불후의 명곡2 - 남의 음악 우리 노래, 번안가요를 듣다
문화의 수입은 예외없이 번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른 나라, 다른 문명, 다른 문화권, 전혀 다른 양식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고스란히 옮겨와야 한다. 체험하고 체화한다. 처음부터 자기 것처럼 창조할 수 없으니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베껴 그것을 학습해야 한다. 더 나은 문화, 더 앞선 문명을 동경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음악도 예외일 수 없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음악이 필요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양식의 음악이 간절히 필요했었다. 그러나 아직 그같은 음악을 스스로 창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개화기 유행하던 계몽적 내용의 창가들은 일본의 창가에 가사만 바꿔붙이고 있었다. 그보다 더 세련된 솔직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감정을 담아 노래로 부르려 했을 때는 그것이 시작된 유럽의 멜로디를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엔카라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트로트로 발전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과 함께 미국의 대중음악이 한국의 대중들에 소개될 때도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가사와 한국인에 의해 불려진 노래가 함께하고 있었다. 곡은 미국인이 쓴 미국의 음악이지만 가사는 한국인의 정서이고 감정이었으며, 한국인만이 이해하는 구성짐으로 한국인에 의해 소화되어 불려지고 있었다. 포크가 대중화되기 전에도 많은 포크가수들은 기존의 포크음악에 가사만 붙여 자기식대로 소화해 대중과 호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스스로 곡을 쓰고 자신의 곡에 한국인만의 감성을 담아내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번안음악이야 말로 선진음악을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셈이다. 아직 우리들 자신에게 없는 것이지만 장차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탐나는 남의 것들인 것이다. 그렇게 한국의 대중음악은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확실히 느낀다. 번안노래도 결국은 우리노래라는 것을. '물레방아 인생'은 미국의 전통음악인 컨트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조영남이 그것을 이 땅에 소개했을 때 한국인만의 구성짐으로 소화해 부르고 있었다. 조장혁의 목소리가 그것을 닮아 있었다. 말 그대로 기타 하나에 의지해 전국을 떠도는 유랑악사처럼. 자유롭게 바람은 벗삼아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들려주는 떠돌이 가수처럼. 노래를 느끼고 있었다. 깊이 그 가사를 느끼며 부르고 있었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바뀌면 노래의 맛도 달라진다. 제대로 노래를 듣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춤을 춘다. 사람의 목소리가 춤을 추고 있다. 노래는 노래일 뿐. 노래를 즐긴다. 이해리의 '정열의 꽃'을 들으며 받은 인상이었다. 노래에 매몰되기보다 노래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려는 듯.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가수일 것이다. 노래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이해리의 매력에 깊이 취해버리고 만다. 노래가 즐겁고 무대가 즐겁다. 무대를 즐기는 가수 이해리가 있어서 관객 역시 즐겁다. 라틴의 정열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이수영의 목소리는 그에 비하면 흘러가고 있었다. 생각이 흘러가듯. 감정이 흘러가듯. 문득 이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듯. 먼 그리움과 먼 상념이 이수영과 함께 노래처럼 휘감고 지난다. 닿지 않는 아득한 감정이었을까. JK김동욱의 감상도 어쩐지 설득력 있다. 홀로 선 겨울나무 주위를 맴도는 벌새처럼. 그러나 한 번에 와닿는 강렬함이 없는 것은 그것이 외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닿을 리 없기에 그래서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휘성은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노래를 부르기보다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다채로운 편곡과 휘황하기까지 한 휘성의 기교, 그리고 제시카 HO와 주고받는 랩까지. 그것이 하나의 소리가 된다. 하나의 음악이 된다. 멜로디를 쪼개고 가사를 나눈다. 조각난 파편들이 마치 퍼즐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저 듣는다. 그저 느낀다. 자기 길을 간다.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음악이라는 그 자체에 취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즐겁다. 휘성 자신이 즐기고 있었다. 어떤 경지를 본 듯한 만족감마저 느낀다. 현미의 '밤안개'와 다르다.
방미가 처음 '날보러와요'를 불렀을 당시 디스코는 최첨단의 댄스음악이었다. 틴탑이 '날보러와요'를 무대에 올렸을 때도 최첨단의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틴탑만의 매력과 자신감이 느껴지는 칼군무가 몽환적으로 반복되는 전자음의 비트와 어우러진다. 방미의 '날보러와요'가 그랬듯 지금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멋진 무대가 되었다. 한 마디로 멋있었다. 니엘의 목소리는 마치 음악의 한 부분 같았다. 캡의 랩은 음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정재욱의 무대는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너무 정적이다. 재미가 없다. 댄서들이 차라리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다못해 표정만이라도 보다 풍부하게 지어 보였다면 어땠을까? 몸짓도 보다 과장되게, 혼자서 춤추기보다 댄서들과도 어울리며. 너무 진지하다. 노래는 넘치도록 잘 부르는데 정작 듣는 자신은 지루하다. 박일준이 '아가씨'를 부를 때도 이렇게 뻣뻣하게는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만 잘해서는 부족하다. 대중음악이란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하다. 아쉬운 무대였다.
결국은 한국음악이라는 것일 게다. 한국의 대중음악이다. 한국인이 사랑한 음악이다. 한국인이 즐겨 듣고 따라부르던 음악이다. 원곡이야 어찌되었든 그것에 한국인의 감성을 담아 한국인의 목소리로 부른 것은 바로 한국인 자신인 것이다. 하기는 한국 대중들에 사랑을 받았으니 번안가요인 것이다. 지금 그 음악들이 다시 태어난다. 가만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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