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명곡2 - 마음을 울리는 록커의 진정성, 김바다 우승하다
김바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사이케델릭이다. 시나위의 새로운 보컬로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필자가 떠올린 첫느낌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고음의 락커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헤비메탈 특유의 그로울링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흔한 허스키보이스도 아니었다. 당시 시나위가 추구하던 음울하면서도 강렬한 얼터너티브에 최적화되었다. 마치 사람의 목소리에도 일렉트릭 기타마냥 강렬한 디스토션을 걸어놓은 것만 같았다.
시나위를 좋아했던 필자에게 김바다란 시나위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1980년대 헤비메탈의 전성기를 열었던 당사자가 바로 시나위였었다. 최초로 한국어로 된 헤비메탈 음반을 내놓아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핸드음악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상당한 음악적 성취를 이루어내기도 했었다. 멤버가 계속 바뀌는 가운데 리더인 신대철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기타리스트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신대철다웠던 것은 사이케델릭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5집 이후가 아니었을까? 손성훈과 먼저 5집을 내놓았지만 이내 손성훈이 시나위를 나가며 새롭게 받아들인 김바다에 의해 시나위의 스타일이 완성되고 있었다. '나는 가수다'에서 신대철과 김바다가 다시 시나위의 이름으로 무대에 섰을 때 얼마나 설레었던지.
라이브에서 음정이 불안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어차피 그같은 위태로움이 김바다의 매력이기도 했다. 오히려 거칠기 때문에 언제 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거친 고음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래서 무척 자연스럽다. 강하지만 그래서 더 여리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것 같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고 간절하고 안타까운 모든 감정들이 짧은 마디에 고스란히 담긴다. 김아중이 번안해 부른 '마리아'를 다시 리메이크했을 때도 처절함을 넘어선 간절함을 들려주고 있었다. 음울한데도 어쩐지 희망을 느낀다. 절망에서 희망을 소망하듯이. 비로소 세상이 그를 맞아주었다.
지난주부터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김바다는 출연가수로 대기실에 있을 위치가 아니다. 오히려 전설의 자리에서 후배가수들의 경연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히트곡이 없다. 유리상자가 대기실에서 한참어린 후배가수들과 경쟁하는 이유다. 항상 비주류의 음악만 하고 있었다. 밴드음악의 불모지에서. 록이 소수의 마니아의 문화로 전락한 한국의 현실에서. 시나위 이후로는 거의 드문드문 이름이 들려올 뿐이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대중과 만나고 있었다. 조금은 서운하고, 그럼에도 쟁쟁한 후배들과 경쟁해서 우승한 것이 뿌듯하다. 김태원과 신대철, 김도균, 임재범, 그리고 이제는 김바다.
자기를 향해 말을 건다. 자기 이름을 부르고 남에게 이야기하듯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래속 '방랑자'는 어쩌면 이기찬 자신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외롭고 여전히 안주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그렇게 위로하고 그렇게 힘을 내어 그러나 여전히 자신은 쓸쓸하다. 관객이 아닌 거울을 마주한다. 자기의 이야기다. 자신의 노래다. 그리고 관객 자신의 노래다. 감정에 젖어든다.
윤항기와 윤복희가 처음 '노래하는 곳에'를 불렀을 때 그것은 노래가 주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찬가였을 것이다. 노래란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노래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가. 그에 비하면 JK김동욱의 '노래하는 곳에'는 영가에 가까웠다. 노래란 얼마나 위대하고, 노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경건해져야 하는가. 하지만 대중음악이란 아티스트의 경외가 아닌 대중의 즐거움 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던가. 너무 무거웠다. 너무 진지했다. 관객의 감정마저 가두고 억누르는 듯하다.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장현승의 '웨딩케이트'는 세시봉을 넘어서는 경이였다. 이런 식으로도 편곡이 가능하구나. 이런 식으로도 노래할 수 있구나. 춤도 출 수 있구나. 그렇게 관심을 가지던 아이돌은 아니었다. 그저 포미닛의 현아와 트러블메이커라는 프로젝트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정도만이 그에 대해 아는 정보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젊은 재능은 언제나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그다지 기대가 없었기에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패인이라면 인지도와 낯섦이다. 조금은 요즘과 맞지 않는 가사가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보물을 주운 기분이었다.
과연 VOS다웠다. 하얀 눈을 맞으며 떠나간 이를 그리는 서러움이 로맨틱한 이야기가 되고 관능의 경험이 된다. 감정을 넘치지 않게 조절할 줄 안다. 적당히 누르고 적당히 드러내는 슬픈 감정이 아련한 눈속에 묻은 옛이야기마냥 아름답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아파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눈물을 흘렸어도 사랑했기에 아름답고 사랑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사랑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사랑노래를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눈을 감는다. 오랜만에 듣는 달콤하고 관능적인 사랑노래였을 것이다.
아쉽다면 태원의 경우 '이제는'을 몇 번이나 반복해 돌려보았음에도 그다지 인상에 남는 것이 없더라는 점일 것이다. 무엇이라 평가해야 할까? 노래를 잘한다? 서울패밀리의 노래가 너무나 강하게 인상에 남아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위일청의 감성적인 거친 목소리와 김승미의 시원시원한 풍부한 성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번안가요사상 가장 훌륭한 성공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장현승처럼 아예 다르게 편곡하지 않는 이상 원곡자와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바로 리메이크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420점이라는 고득점은 그럼에도 태원의 노래가 얼마나 관객의 마음을 훔쳤는가 하는 기준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Jermaine Jackson의 원곡을 들으면서도 항상 서울패밀리의 '이제는'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중견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어색하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무렵 대부분 아직 학생이거나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이제 새삼 대중과 만나는 기회를 갖는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재회의 기쁨을, 아직 그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가능성을 넓힌다. 유일하다. 오로지 한 사람 김바다만이 가능한 목소리다. 모두가 좋아하는 보편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관객의 선택으로 마침내 우승까지 거두었다. 대중과 만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김바다의 새로운 자신만의 스타일을 기대해 본다. 그의 음반을 들은지 오래 되었다.
조금은 아쉬운 감도 있었다. 너무 나이들이 많다. '나는 가수다'가 사실상 폐지된 것과 궤를 같이 할 것이다. 아직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젊은 가수들의 실력을 선보인다. 그런데 점점 나이대가 올라가더니 김바다는 벌써 40대다. 조장혁과 정재욱, 이수영 모두 30대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지만 휘성과 VOS 모두 베테랑이라는 말이 어울릴 나이다. 오히려 이번 미션의 경우는 더 젊은 가수들로 채우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약간의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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