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 하나뿐인 몸뚱이, 그조차 내 것이 아닐 때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룰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 룰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뿐이다. 그러나 그 몸뚱이마저 누군가에게 재단되어지고 만다. 평가되고 판단되어진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가야 한다.
그러고 보면 공교롭다. 오지영(이연희 분)이 마애리(이미숙 분)에게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던 그 순간 황사장(정승길 분)은 정선생(이성민 분)을 앞에 두고 김형준(이선균 분)의 목숨값을 매기고 있었다. 생명보험을 들고 사고를 당하면 5억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의도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막다른 궁지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오지영은 기꺼이 자신을 평가하려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 내놓는다. 타인에 의해 자기를 계량한다.
김형준과 제주감귤아가씨에 출전하려 백화점의 옷을 훔치다 걸린 탓에 어쩔 수 없이 백화점 엘리베이터걸의 일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자신으로 인해 곤란한 처지가 된 후배를 위해 그나마 퇴직금마저 부장에게 내놓아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오지영에게 남은 것은 미스코리아 뿐이다. 자신의 몸을 수단으로 삼는다. 타고난 자신의 외모를 수단으로 삼아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그런데 그 몸의 일부가 문제가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가슴사이즈에 비해 상당히 작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심사위원이 요구하는 기준에 비해서도 매우 작은 편이다. 마애리가 보기에도 오지영이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서는 수술이 필요하다. 자기의 몸이다. 부모가 낳아준 그대로의 가슴이다. 그런데 그것이 부끄러움이 된다. 항상 감추고 다녀야 했고 한 번 당당히 남들에게 드러내보이지도 못했다. 그런 자신의 가슴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자 결심했던 이유, 그 가슴을 모두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자기를 수단으로 삼기 위해 가슴을 수단으로 삼는다. 자기의 몸이고 자기의 가슴이지만 세상의 - 그것을 판단하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성매매와 관련해서 항상 거론되는 성매매종사자의 자발성에 대한 논란이 그 예일 것이다. 납치나, 협박, 폭행 등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면 성매매를 생계수단으로 삼은 당사자의 선택은 순수한 자발적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매매란 무척이나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매우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지기 십상일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수치스럽기 이를 데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성매매를 한다고 당당히 밝힐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의 몸을 수단으로 삼아 성매매를 결심한다. 대개는 절박함이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궁지일 것이다. 그것을 과연 자발적이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일자리를 잃고, 그나마 벌어놓은 돈마저 모두 내어놓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 순간 오지영이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미스코리아였다. 김형준과 함께 하기로 했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다. 백화점 엘리베이터걸도 계속 하면서 김형준과 함께 미스코리아도 나가 보겠다. 미스코리아가 되어도 좋고 아니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굳이 미스코리아가 아니더라도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편한 것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때까지는 가슴수술도 순전히 자신의 열등감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미스코리아란 반드시 거머쥐어야 하는 마지막 기회가 되고 말았다. 김형준과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그녀의 등을 떠밀었을지 모른다.
자기의 몸이 수단이 된다. 자기의 몸이 수단이 되면서 자기의 몸에 값이 매겨진다. 자기의 몸값을 높이고자 다시 자기의 몸을 수단으로 내놓는다. 몸뚱이 하나 뿐이기에 그 몸뚱이 하나의 값을 높이고자 자기의 몸을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춘다. 자기의 소유이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다. 자기의 몸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비상하게 현실적이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방을 빼서 돈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 돈을 모두 오지영에게 쏟아붓는다. 오지영의 가슴이 그대로도 좋다는 자신의 신념마저 돈과 함께 내놓는다. 삶이란 얼마나 비루한가. 자기 가슴은 자기 것이라는 오지영의 말은 그래서 지독한 역설이 되어 들린다.
하기는 오지영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김형준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정선생도 살기 위해 - 5억이라는 돈을 위해 다시 한 번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 나름대로 김형준을 죽이고 싶지 않은 선의로 저지른 행위일 것이다. 김형준을 위해 김형준과 그의 회사사람들을 곤란에 몰아넣고 만다. 삶이란 이렇게 역설투성이다. 모순투성이다. 원하지 안아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예정되지 않은 일들임에도,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리 되고 마는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를 탓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그리 할 수밖에 없었던 피치못할 이유라는 것이 있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만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세상에 하고 싶어 하는 일이란 얼마나 될까? 세상에 반드시 해야만 해서 하게 되는 일이란 또 얼마나 될까?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을 수는 없으니. 가족을 위해서.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오지영은 그나마 자신을 위해 자기를 수단으로 내놓는다. 자기의 꿈과 삶과 행복을 위해 자기를 수단으로 내놓으려 한다. 김형준은 자신의 꿈과 자신이 책임져야 할 많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수단으로 내놓으려 한다. 정선생은 우습게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김형준네 회사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내던진다. 욕먹고 경멸당하면서도 의외로 그는 순수하다. 자기는 가져본 적 없는 김형준네들의 꿈이 그를 끌어당기는 때문일 것이다. 사납고 여자답지 못하지만 고화정(송선미 분)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마애리가 미스코리아에 집착하는 이유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애리의 비서인 윤실장은 끊임없이 오지영에게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야기한다. 공짜는 없다고. 결국 마애리가 오지영에게 베풀려 하는 배려는 마애리 자신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마애리는 그렇게까지 하려는 것일까.
"나와 함께 할 때만 너는 1등이야!"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겠다. 다른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은 절대 살지 않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선발되었다고 하는 높은 자존심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미스코리아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자기를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룰을 세우려 한다. 미스코리아를 끊임없이 키워냄으로써 미스코리아로서 미스코리아 자체의 룰이 되고자 했던 것이었다. 오지영에게 거부당하고, 김재희(고성희 분)의 반항을 마주한 뒤 외롭게 와인을 들이키고 춤을 추는 모습은 그녀의 고독을 말해준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이다. 그녀는 룰을 지키는 쪽이 아닌 룰을 만드는 쪽에 서 있다. 치열한 투쟁의 시간들이었다. 야멸차지만 그녀만의 절박함이 그녀를 곧추세우고 있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누구보다 오만하다.
아무튼 필재 개인적으로 오지영이 끝내 가슴수술을 받고 마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실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다. 단순한 가슴수술이 아니다. 김형준의 말처럼 그녀가 나고 자란, 그녀가 살아온 그동안의 흔적들이며 그녀 자신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이 선택해서도 아닌, 필요를 위해 그 가슴을 수단으로 내놓는다. 철저히 자기를, 자기의 몸을 수단으로 여기고 만다. 인간의 존엄함이란 단지 사치에 불과하다. 오지영이 눈물을 흘릴 때 울컥 치미는 무엇이 있었다. 무엇을 자신은 그렇게 놓아버려야 했을까.
하지만 드라마였다. 드라마란 판타지다. 아무리 우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더라도 결국은 희망도 함께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작으나마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드라마로 인해 충격받고 의욕을 잃어서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자기의 가슴을 아름답다 말해주는 김형준을 믿어보고자 한다. 수술따위 받지 않아도 자기를 미스코리아로 만들어주겠다는 김형준의 장담에 자신을 걸어보기로 한다. 꿈을 꾸어보기로 한다. 비록 이루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기에 부끄럽지 않게. 자기를 속이지 않도록. 자기를 위해 화내고 힘껏 달려와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입장만을 챙기는 이기가 귀엽기조차 하다.
이 사회의 무수한 패자들에게 보여주고픈 꿈이었을 것이다. 주위의 수많은 열등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바닥에서부터 부딪히려 한다. 아무런 보장도 없는 불안한 미래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고 한 번 도전해보려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사랑하며. 자기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며. 힘껏 맞잡은 손에 자신을 걸어본다. 그래서 판타지다. 세상에 미스코리아를 꿈이라도 꾸어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아주 소수에 불과할 것이므로. 원래부터 오지영이나 주위에서나 그녀가 아름다운 것을 알고 있었다.
삶이란 투쟁의 연속이다. 고난과 싸워가는 과정일 것이다.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서도, 자신이 만든 화장품으로 세상의 여자들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도. 꿈을 위해서도. 정선생에게도 싸워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도망치기만 했었다. 그저 쉬운 길만을 찾아 돌아가려 했었다. 악해질 용기조차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순수하다. 삶에서 순수란 때로 악이다. 어쩌면 뒤늦게 소년이 어른이 되고자 한다. 뜻밖에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
이연희의 변신이 놀랍다. 필자가 알던 그 이연희인가 싶다. 그저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만 키우면 되는 줄 알던 그 이연희가 아니다. 복잡한 표정을 지을 줄 알게 되었다. 표정에 한 편의 드라마를 담아낼 줄 알게 되었다. 조금은 난감할 수 있지만 자신의 신체사이즈를 드라마의 주제로 살려낸 부분은 칭찬할 만하다. 단순한 신체적 컴플렉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짓누르는 열등감과 수단화되고 계량화되는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그동안 많이 어두웠다. 드라마는 결국 판타지다. 설렘이 있어야 한다.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두근거리며 기다리게 만든다. 오지영과 김형준이 마침내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작은 그들에 비해 넘어야 할 적은 너무나 크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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