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비로소 백성과 부대끼며, 기로에 서다

까칠부 2014. 1. 20. 07:31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정치따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정치인들이 무엇을 하든 그것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저 쓸데없이 싸움질이나 하는 정치인들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기만 하다. 고려가 명과 화친을 하든, 아니면 북원과 화친을 하든 그것이 자기들과 무슨 상관인가. 하물며 온갖 차별과 천대를 당하는 부곡민임에야.


그러나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몽골군이 천민이라고 봐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에 의한 수탈이 심해질수록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는 것 역시 비천한 신분의 하층민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고려의 지배층은 원간섭기 원에 협력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는 것도 많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으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 또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 정치가 중요하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따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는 무력한 자신은 그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내게 닥친 일이 아니니까. 아니 설사 당장에 닥치고 난 뒤라 할지라도 그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를 욕하고 말면 그만일 것이다. 다 그놈들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썩어빠진 위정자들 탓이다. 그래서 더 혐오한다. 그래서 더 일부러 외면한다. 그나마 고려의 부곡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알면 알수록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만 커질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썩은 정치를 욕하고 잘못된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로 삼는다. 어떻게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은 어떻게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데에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진지하게 동의를 구하려 않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오만도 크게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의 언어에 갇힌다. 자기의 사고에 갇힌다. 과연 자신이 하는 말을 저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불과 얼마전까지 많은 처녀들이 원에 공녀로 끌려가고 있었다. 원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이 물려지기도 했었다. 부곡이라면 그 정도가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그것을 경험한 이가 부곡민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을까. 그러나 정도전은 단 한 번도 그같은 부곡민과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눠 본 경험이 없었다.


정도전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원래 정도전이 고려를 바꾸고자, 아니 아예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유배지에서 겪었던 고려백성들의 비참한 현실 때문이었다. 그들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써 대화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한다. 어째서 못배운 백성들이 그깟 돌 하나 나무 하나를 신으로 여기며 정성을 다하는가. 무당이 되지 않겠다고 돌을 쌓아 오히려 신에게 빌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유교는 아직 백성들을 위로하기에는 너무 어렵기만 하다. 아니 아니다. 정도전의 오만함은 비단 권력을 향해서만 발휘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백성의 입장이었던 적이 없었다. 사대부의 입장에서 본 백성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기는 했었다.


자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떠들어댄다면 그것은 결국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알아들을 수 없고, 당연히 이해할 수도 없다. 공감할수도,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다. 그냥 그들은 떠들고 나는 나대로 떠든다. 어떤 외국어보다도 어려운 것이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그것을 일부러 조장하기도 한다. 오히려 비천한 것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높은 언어로써 소통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정치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정도전에 대한 경멸에는 그가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라고 하는 체념과 인정이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은 결코 서로 소통할수도 이해할수도 없다. 해서도 안된다. 경멸밖에 할 것이 없다.


역시 너무 나가고 있다. 안사기는 그저 김의를 사주하여 명나라 사신을 죽인 일로 책임을 물어 효수되었을 뿐이었다. 굳이 최영(서인석 분)의 힘을 빌 필요도 없었다. 이인임(박영규 분)이 직접 나서서 국문하고 그를 처형하면 되었을 일이었다. 우왕 즉위초 이인임은 고려에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이인임의 노회한 정치력으로 왕이 시해당하고 혼란스럽던 고려의 정국이 한순간에 안정되었다. 그것은 최영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복흥은 처음 이인임과 협력하여 고려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는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인임을 제거하고 나면 과연 누가 있어 이인임의 역할을 대신할 것인가. 최영과 이색이 아무 이유없이 이인임의 탐욕과 전횡을 눈감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쉽게 위기기 찾아온다. 명덕태후(이덕희 분)가 움직이고 최영이 전면에 나선다. 경복흥은 오랫동안 이인임을 견제해 왔었다. 이색과 문하의 신진사대부들이 그를 뒷받침한다. 말 그대로 고려 전체가 이인임에게 등을 돌린 듯하다. 그 말은 곧 이인임과 고려가 서로 분리된다. 이인임의 부패와 전횡은 고려와는 상관없는 이인임 개인의 일탈이며 악이었다. 무리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고려로부터 부정당했으니 다시 고려의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이 된다. 단지 개인의 악이 드러난다.


역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무학대사(박병호 분)의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왕이 될 운명이다. 때를 기다리는 효웅이다. 한 발 물러나 주위의 경계를 피하고, 덕을 베풀어 사람의 마음을 잡으며, 몸을 웅크린 채 실력을 기르며 장차 자신이 일어설 그때를 기다린다. 고려말 혼란스럽던 정세와 급변하는 상황은 충분히 이성계에게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었다. 몇 차례 외침을 겪으며 와해되다시피 한 고려의 중앙군은 이성계의 군벌을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사람좋아보이는 얼굴 뒤에 숨은 야심이 섬뜩할 정도다. 결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최영이 이인임을 용납하고 이인임이 최영을 용납했다. 이색이 이인임을 이해하고 이인임 또한 이색을 이해했다. 그래서 우왕 즉위초 위태롭던 고려의 상황이 큰 문제없이 봉합될 수 있었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주어졌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며 고려에 새로운 대안이 나타났다. 간신 하나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는 선악이 아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그마저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대중을 위해 봉사한다. 대중은 선악으로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하고 편하게 생각한다.


과연 간웅이다. 세상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안사기를 죽이게 하고, 그러면서 죽은 안사기를 위해 진심어린 애도를 보낸다. 거창한 명분으로 자살을 종용하다가도 안사기가 반발하자 본색을 드러내며 그를 위협하다. 그런 점에서 너무 쉽게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쉽다. 더 오래 최영을 속이고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한계를 드러낸 느낌이다. 박영규의 이인임에 비해 드라마의 이인임의 크기가 아쉽게 드러난다. 박영규라는 배우의 크기일 것이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겪는 일들이 어쩌면 드라마의 성격을 정의할 것이다. 정도전이 겪는 변화가 정도전이라고 하는 인물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 초월적인 선지자이거나, 아니면 현실과 함께 호흡하는 '인간'이거나. 차라리 신앙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하는 모든 것이 옳다. 인간과 세상을 이끈다. 사람과 시대와 함께 간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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