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 상관없어졌거든! 운명의 이유

까칠부 2014. 1. 25. 07:23

"상관없어졌거든. 상관없어. 당신이 누구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 말못할 사정이 있든... 눈 떴고, 일어났고,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운명이란 지금이다. 현재가 결정하는 것이다. 과거 무슨 일이 있었든, 어떤 일들이 예정되어 있었든, 그래서 앞으로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결국 그것을 운명이라 여기는 지금이 있기에 그것은 운명이 되는 것이다.


모른 채 지나쳤다면.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다면.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곁에 있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소설 '타나토노트'의 한 장면이다.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전생에 자신에게 운명이 예정한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두 사람은 현생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전생의 인연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천송이(전지현 분)의 전생이 400년 전 도민준(김수현 분)을 지구에 남게 만든 소녀 이화였다고 해서 지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2년 전 천송이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도민준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도 한 사람을 12년이나 사랑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지금에 와서 천송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어느 TV프로에서처럼 그저 한 번 만나 회포나 풀고 마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실제 12년 전 이화의 환생이라 여기고 천송이를 구했던 도민준은 지금껏 그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화가 그렇게 도민준에게 절실했다면 도민준은 결코 천송이의 주위에서 멀어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아쉬움이었다.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오랜 후회였다. 이화의 마음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천송이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래서 지금처럼 간절한 모습까지는 아니었었다. 그냥 지난 인연이고 오랜 기억이다. 그런데 그것을 운명처럼 여기게 되는 것은 결국 400년 뒤 도민준이 천송이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전혀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천송이가 12년 전 자신을 구해준 도민준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유세미(유인나 분)가 12년 전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에 대해 말하려 했을 때 천송이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한다. 다 지나간 일이다. 기억마저도 퇴색되고 고마움의 감정마저 그때와 같지 않다. 그러나 지금 도민준을 사랑하게 되고 도민준으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을 때 그것은 어쩌면 예정된 운명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12년 전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완벽하게 짜맞춰진 얘기처럼 들리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자신이다. 지금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까지 정의한다. 지금 자신의 감정과 상태가 과거의 인연들까지 모두 하나로 꿰어 잇는 기준이 된다. 전혀 상관없는 사이였다면 그저 과거에 그런 일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에게 상대가 어떤 의미를 가질 때 과거의 기억들까지 그 의미의 연장에서 이해된다. 악연이라면 후회할 테고, 그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면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것이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일들로 인해 지금의 지금이 만들어졌다. 아름답지만 - 아니 아름답기 위해서일 것이다. 믿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필연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만난 것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사람이 묻히는 곳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곳은 그곳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고향을 떠났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 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 함께인 꿈을 꾸고 싶다. 그것이 헛된 바람에 불과할지라도.


과거를 말한다. 먼 과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기에 의미가 있다. 내일을 이야기한다. 예정된 두 달 뒤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결국 그 또한 지금을 위한 미래다.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은 사랑하고, 그럼에도 지금 두 사람은 사랑하려 한다.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된다. 400년 전의 전생도, 두 달 뒤면 떠나야 하는 예정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까지도. 하지만 지금 그들은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려 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송이로써. 그리고 도민준으로써.


온전히 도민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도민준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천송이에게 전하려 한다. 쉽지는 않다. 너무 멀다. 그저 어디 바다건너 먼 나라 수준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거리다. 인간이 아니라 한다. 당황한다. 어쩌면 약간의 고비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도민준을 사랑한다. 다만 해피엔드인가는 모르겠다. 복선처럼 불길함이 전해진다.


지구에서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그 부조화가 지금껏 도민준을 버티게 했지만 이제 한계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 400년 전의 명의 허준(박영규 분)의 조언이 어떤 복선처럼 여겨진다. 죽음을 말하는 도민준의 모습이 예고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그리고 먼 우주의 거리가, 그럼에도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부나방처럼 그 한 순간의 쾌락을 향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하긴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사랑하려 할 뿐이다.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서로를 원한다. 서로를 간절히 바라며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한다. 이미 천송이에게 연예인으로서의 삶이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인기를 되찾는 것도, 그래서 다시 이전과 같은 부와 인기를 누리는 것도 크게 관심이 없다. 도민준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지구에 남고 싶어 한다. 이재경(신성록 분)와 거래를 하려 한다. 천송이를 위해서. 그로 인해 하마트면 죽을 뻔 했음에도.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편으로 운명을 믿듯 기적도 믿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휘경(박해진 분)은 좋은 친구다. 그리고 좋은 남자다. 눈치없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렇다고 배려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천송이를 위해 자신의 진심을 거절한 그녀의 주위에 머문다. 천송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 그래서 유세미와도 절교를 선언한다. 보답받을 길 없는 외사랑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가를 알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희망의 싹조차 남겨두지 않으려 한다. 이재경의 정체에 대해 조금씩 눈치채가는 것 같다. 이재경을 멈추는 브레이크가 될까. 아니면 이재경의 악의를 극대화하는 비극의 촉매가 될까. 좋은 사람은 오래 살기 힘들다.


유세미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려 한다. 그만큼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녀를 절벽 끝까지 내몬다. 이휘경을 사랑하는 만큼 이휘경이 사랑하는 천송이를 질투한다. 이휘경을 가지고 싶은 만큼 이휘경의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천송이를 원망하고 증오한다. 이휘경에게 거절당하고 유세미는 천송이를 향한 자신의 서툰 악의를 드러낸다. 천송이가 한 번에 알아챌 정도로 미숙한 악의다. 밉다기보다 차라리 가엾다. 어울리지 않는 악역을 맡느라 자신마저 잃어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기에는 그녀가 놓은 처지가 너무 절박하다.


천송이에게 복수하려 한다. 무엇보다 그녀를 분노케 한 것은 천송이의 경멸이다. 차라리 화를 내고 따지고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했어도 그것이 오히려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천송이가 유세미에게 보인 것은 분노도 증오도 아닌 경멸과 동정이었다. 천송이의 약점을 안다. 한때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천송이의 자존심을 짓밟으려 한다. 천송이를 동정함으로써. 천송이를 동정받게 함으로써. 과거의 천송이었다면 큰 상처가 되었으리라.


차안에서 이휘경이 담담히 전하는 실연의 경험이 마음을 울린다. 무엇보다 실연하고 슬픈 노래를 듣지 말라는 말이 직접 와 닿는다. 그때 불렀던 노래들을 지금도 가끔 우울하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고는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노래가 자기 이야기인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슬픈 노래는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절절하다. 그래도 여전히 이휘경은 천송이를 사랑한다. 유세미하고도 전혀 다른 천진함마저 느껴진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그의 비극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무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민준의 모습이야 말로 이 드라마의 참된 주제일 것이다. 도민준의 진실을 비로소 들으며 천송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름답지 않다.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행복할 기약조차 없다. 아프고 두렵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사랑을 한다.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끝이 불행인 것을 알면서도. 아니 사랑할 수 있다면 불행조차 불행이 아닐 것이다. 지금인 것처럼 사랑인 것이다. 오직 그 하나 뿐.


코미디라기에는 지나치게 어둡다. 그러나 불길하고 음울한 가운데서도 한 가닥 밝은 활력이 느껴진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간다. 상처입고 상처주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던 천송이가 모든 것을 되찾는다. 아무것도 없던 도민준이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로맨틱이 코미디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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