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양지의 죽음, 정도전 마침내 뜻을 세우다
하기는 비단 고려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절에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시국사건을 일으켰다. 북한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공안정국을 만들고 그것을 권력을 위해 이용했다.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었으며 법원이 협력했다.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수사조차 그를 위한 훌륭한 도구였을 뿐이다.
물론 백성들은 모른다. 국민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만을 믿고 오로지 판단할 뿐이다. 정의감이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그 가족마저 죄인의 가족이라 연좌한다. 그래서 더욱 권력은 시국사건을 일으켜 그것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으며 그저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만을 믿고 판단까지 맡겨 버린다. 무지한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백성처럼 권력의 입장에서 이용하기 쉬운 것도 없다.
이인임(박영규 분)이 정한 그대로를 믿어 버린다. 당사자가 자복했으니까. 그 수단은 묻지 않는다. 그 과정이나 동기 또한 알려 하지 않는다. 이성계(유동근 분)를 존경하기에 돌을 던진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양지(강예솔 분)는 죄인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 속에 철저히 고립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다. 그나마 그녀의 무고함을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한 사람이 있기에 양지는 죽어가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녀를 지키지 않았고 지키려 하지 않았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본질은 결국 같을 것이다. 이방원(안재모 분) 역시 정도전(조재현 분)을 죽이고 그를 역적으로 몰고 있었다. 조선말에야 겨우 복권이 되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도전이라면 간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측근인 강상인을 이용해 장차 세종이 될 세자의 외척을 정리하려 할 때도 맟나가지였다. 권력 앞에 사람의 목숨이란 결국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한 사람의 삶도, 존엄도, 결국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무고한 두 사람의 죽음을 결정하고 나서도 원하는 양보를 얻어낸 이인임의 표정은 밝다. 무고하게 전법사로 끌려간 두 사람을 구해달라 달려가 부탁했건만 정몽주(임호 분)가 선택한 것은 보다 가치있다 여긴 이성계의 안전이었다.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무고한 두 사람을 죽이려 한 이인임과 정몽주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나마 이성계가 양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자신으로 인해 희생당한 양지의 무덤을 찾아 자기가 잡은 사슴의 가죽을 정성스레 덮어준다. 세상에 단 두 사람이다. 이성계와 정도전. 아무 이름없는 백성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주는 단 두 사람인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유이고 정도전이 고려를 멸망시키는 이유다. 정몽주가 고려를 지키려 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몽주가 추구하는 대의와 정도전이 이루고자 하는 정의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양지라는 매개를 통해 이후 그들이 선택한 서로 다른 길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왕조와 사직과 대의라고 하는 명분이 서로 부딪힌다. 이방원이 황천복(양태성 분)을 죽이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굳이 양지라는 허구의 캐릭터를 일부러 만들어 등장시킨 이유일 것이다. 로맨스가 아니었다. 양지는 그야말로 고려말 고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없는 민초 자신이었을 것이다. 권력에 의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끝내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마는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사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에 희망이 보일까. 아무거라도 답답하기만 한 현실에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전의 유학자로서의 완고함이 양지를 거부하고 말았다. 정몽주의 정치가로서의 판단이 양지를 외면하고 말았다. 이성계를 살리기 위해 양지가 죽어야 했다. 최영은 어쩌면 양지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인임은 양지를 죽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것이다. 양지를 기억하는 두 사람이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는 것은 과연 우연인가. 드라마의 제목이 '정도전'임을 주목한다.
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되는 이들과 그것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이들과 아예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 그리고 그에 부화뇌동하여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붓는 이들에 대해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그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 혁명이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맥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역사를 어떻게 꾸며쓰는가가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지금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방원의 난폭한 모습은 작가가 예비한 드라마의 의도일 것이다.
사실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의붓어머니에 대해서까지 부모자식간의 의리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의 아내라 해서 과연 자식이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가는 조선중기까지 끊이지 않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특히 고려에서 자식은 어머니가 길렀고, 따라서 자식은 어머니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버지가 새장가를 가면 자식은 차라리 외가로 가서 외가쪽 친척들 손에 자랐다. 이방원이 굳이 이성계의 경처 강씨(이일화 분)를 어머니라 의식하여 부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반감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실제 조선이 건국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강씨와 이방원의 사이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역시 드라마적인 장치일 것이다.
과연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일 것이다. 이성계를 제거하려 역모를 조작한 사실이 들통난 뒤임에도 이인임은 태연히 자신이 얻어낼 바를 말한다. 사실상 더 이상 이성계에게 손을 쓸 방법이 없음에도 자신이 가진 패를 최대한 이용해서 최영의 양보를 얻어낸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방법은 미륵사의 모녀가 죽는 것 뿐이다. 자신을 찾아와 무릎꿇는 정도전을 향해 하는 말도 인상적이다. 남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자는 자신의 당여가 될 수 없다. 자신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자만이 제때 먹이를 준다면 자신을 물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인임의 무도함도 하나의 신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신범이다. 악조차 악으로 알고 악이 아니게 행한다.
마침내 정도전이 일어섰다. 이성계가 양지의 무덤을 찾은 그 순간 양지가 아닌 자신을 찾아온 정몽주와 이색을 외면하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한다. 맹자를 태운다. 소멸이 아닌 공양이다. 불의 선명함으로 더욱 명징하게 맹자의 뜻을 가슴에 새긴다. 고려를 멸한다. 고려의 모든 부조리를 멸한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서라도. 오랜 방황이 끝나려 한다.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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