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그대 - 외계인과 멜로, 특별한 설정이 전형성을 가리다
필자의 경우 그래서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단지 비유로 이해했다. 누구나 외계인이다. 어디에 서 왔는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어쩌면 정보조직의 비밀요원일수도 있고, 신분을 감추고 있는 초능력자일수도 있으며, 혹은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일수도 있다.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는 고향별로 돌아가기 위해 독사에게 스스로 물리고 만다. 그래서 죽음을 다른 말로 귀천(歸天)이라 일컫기도 한다. 죽음을 높여 말할 때도 돌아간다는 표현을 쓴다. 사람의 혼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종교에서는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원래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도민준(김수현 분)이 쓰러져 있다. 빛과 함께 그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빛의 터널이다. 문화권에 따라 수많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 긴 터널을 지나 인간의 영혼은 마침내 사후세계에 이르게 된다. 어느날 문득 죽은 사람을 꿈속에서 다시 만났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토록 그립고 보고 싶어 꿈속에서나마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구나. 영혼은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물론 제약은 있다. 그래서 꿈속이거나 혹은 아주 잠깐 만나고 돌아간다.
가족도, 친구도, 부부의 개념도 없다는 도민준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나고 죽는 것이 사라지는데 혈연이 있을 리 없고, 멀고 가까운 것도 의미가 없어지는데 따로 우정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육체가 없는 영혼에게 설사 부부와 같은 것이 있다 해도 그 의미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그곳에는 존재한다. 한없이 춥고 쓸쓸한 곳이다. 그날 그곳에서 혜성과 함께 그를 데려가려 사자가 찾아온다. 먼 우주의 강을 건넌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그는 죽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어떤 사람을 만난다. 억겁처럼 긴 시간 속에 단 한 사람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 남겨두고 떠날 것이 두려워 처음에는 거리를 둔다.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프고 안타까워 애써 외면하고 부정한다. 그리고 겨우 솔직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상대에게 털어놓는다. 이제 곧 자신은 이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 마음놓고 떠나시라. 아무 걱정말고 잘 가시라. 그리 보내준다.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걱정스레 꼭 쥔 손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풀어준다. 있는 힘껏 웃어준다.
어느 비극적인 멜로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시한부의 삶을 사는 한 남자가 있다. 남자가 여자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별 것 없는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시간들이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화내는, 때로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는 그런 시간들이다. 가끔은 서로에게 질투도 하고 잔소리도 한다.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끝에 두 연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옛날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 그리고 오지 않을 내일의 이야기.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남자로부터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는 영영 다시 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상당히 진부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외계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그의 영혼은 어딘가에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죽은 이후의 세계를 믿는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자신이 있는 이곳과는 다른 어딘가에서 그는 여기에서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만나러 와주기를 바란다. 가끔은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를 꿈꾼다. 그래서 꿈을 꾼다. 죽은 이가 돌아오는 꿈을. 그는 외계인이었다. 자신의 별로 찾아갔다가 다시 자기를 만나러 지구로 돌아온다. 긴 시간은 아니다. 아주 잠깐, 착각처럼 아주 짧은 시간만을 머물다 떠나갈 뿐이다.
사족에 가까웠다. 도민준이 떠나고 내내 남은 시간을 지루함과 싸워야 했다. 뻔한 이야기들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허튼 오해들과 사소한 뒷얘기들과 남겨진 이의 감정들이 그 나머지를 채운다. 혼자 남겨진 천송이(전지현 분)의 모습은 전형 그 자체였다. 아마 도민준이 외계인이 아니었다면 지루함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도민준의 환각을 보고, 그것을 직접 느끼고, 그리고 다시 자신이 모르는 새 돌아간 그 빈 자리를 본다. 장변호사(김창완 분)와 이재경(신성록 분)에게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을 때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야기의 구조와 구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연인들은 항상 하늘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헤어진다. 무의식이다.
어차피 사랑에 빠지면 시간이 멈춘다. 공간이 사라진다. 모든 곳에 그가 있고 모든 시간에 그가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자체가 곧 초능력이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만이 남는다. 아무도 없이 의미없는 길기만 한 시간들을 살아온 남자와 혼자서 세상과 단절된 채 허상으로만 존재해 온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 헤어짐을 전제한 사랑이다.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남겨질 것이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사랑한다.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온통 세상이 격정으로 가득찬다. 어쩌면 이재경 역시 그렇게까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을까.
드라마란 판타지다. 환상이란 꿈이다. 잠들어서도 꾸고 깨어서도 꾼다. 사랑을 한다. 서로 다른 세상에 온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던 두 사람이, 먼 시간의 운명을 되짚어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된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시 만난다. 사랑 앞에 기꺼이 우스워지고 망가질 수 있었던 도민준과 천송이의 솔직함이 드라마를 살렸다. 멋지다.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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