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시대 - 방삼통과 조선인, 주인이 아닌 자의 슬픔
간도의 조선인들이 그랬다. 조선인을 간도로 내몬 것은 일본이었다. 간도를 소유하고 있던 것은 중국인이었다. 일본군에 쫓기고 중국인 지주들에게 수탈당했다. 중국인을 도와 일본군과 싸우고, 일본인들에 선동되어 중국인들과 부딪혔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한 자의 비극이었다. 어디도 그들의 땅이 아니었고 무엇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상하이는 원래 중국의 영토였다. 열강에 의해 조차되었지만 상하이에 거주하는 다수 역시 중국인들이었다. 그 중국인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황방이었다. 상하이매는 그 황방의 양해를 얻어 방삼통에 조선인을 위한 거리를 잠시 빌렸을 뿐이다. 조선인의 땅이 아니었다. 조선인이 묻힐 곳이 아니었다. 상하이매는 물론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겠다.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 뼈를 묻겠다.
황방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일방적으로 나쁘게 그려지고 있지만 황방의 입장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 장개석의 군대에 군자금을 대고 있다고 한다. 시안사건 전이라면 장개석 군대는 중국공산당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중국인들에게 국부라 일컬어지는 저 손문의 유지를 받들고 있었다. 중국은 반드시 다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더구나 시안시건 이후라면 장개석의 군대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항일전선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중국과 중국인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중국인으로서 시대의 요구이며 사명이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편을 팔고, 가짜술을 유통시키고, 조선인에 대한 신뢰와 도의마저 저버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역사적 당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의 희생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방삼통 조선인들의 불행은 방삼통조차 원래 조선인의 땅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남의 나라 남의 땅이었다. 단지 황방의 관용에 기대 자기땅처럼 빌려 머물고 있을 뿐이다. 황방이 아직 여유가 있을 때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사정이 어려워지면 싸게 빌려준 허름한 지하단칸방조차 아쉬워지는 것이다. 나가달라거나, 혹은 방세를 올려달라거나, 겨우 싸게 얻어 신세지던 입장에서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국회의 야심이 점차 노골화되고 만주를 차지한 일본제국주의의 탐욕은 중국대륙마저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방삼통은 이제 일국회가 노릴 수 있는 황방의 가장 큰 약점이 되어 있었다. 황방의 칼이 되어 휘둘러지지 않을 것이라면 그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황방의 사정일 뿐 조선인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것이 문제다. 조선인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황방과는 상관이 있다. 상하이는 중국인의 땅이다. 방삼통은 황방의 영역이다. 황방의 입장에 의해 조선인들이 휘둘린다. 그렇다고 방삼통을 떠날 수도 없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왔다. 기약도 없고 목적도 없다. 이방인이었다. 돌아갈 곳도 없는데 그렇다고 반겨주는 곳도 없었다. 가야 할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휘두르는대로 휘둘려져야 한다. 휘두르면 휘둘러져야 한다.
셋방살이는 그래서 서럽다. 법이 보호하기까지 세사는 사람들은 항상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혹시라도 엄동설한에 당장에라도 방비우고 나가라 할까봐. 어린마음에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합리하게만 여겨지던지. 신정태(김현중 분)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일 것이다. 집주인의 억지스런 요구에도 한 마디 못하는 답답한 형의 모습에 화부터 내는 철없는 어린 동생일 것이다. 방삼통의 조선사람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정재화(김성오 분)에 비해 신정태는 아직 많이 자유롭다. 달리 철이 없다고 한다.
황방을 잡는다. 말은 쉽다. 방주 설두성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부방주 왕백산(정호빈 분) 역시 신정태가 잘하면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와 부방주를 잡는다고 상하이가 조선인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황방이 사라진다고 해서 조선인이 상하이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황방의 배려가 없었다면 방삼통의 조선인 거리도 없었다. 일국회의 뒤에는 일본제국주의가 있다. 그렇다면 방삼통 조선인의 뒤에는 누가 있는가?
만에 하나 황방을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뒤에 남는 것은 조선인 스스로 방삼통을 지켜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 뿐일 것이다. 중국인의 땅에서 중국인에 둘러싸인 채 일국회의 야심과도 맞서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신정태가 방삼통에 머문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방삼통의 현실도 상하이의 실체도 그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정의롭다. 그러나 어리다. 그래도 통쾌하다. 때로 그런 것들을 꿈꾸고는 한다.
비굴한 것도 때로 용기다. 차라리 비겁해질 수 있는 것이 강함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길들여졌다. 그것이 어쩌면 정재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그러했다. 현실이 그러했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신정태에 환호하면서도 결국 방삼통의 조선인들도 정재화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재화 역시 신정태와는 다른 자기만의 방식으로 김옥련(진세연 분)을 구하려 한다. 그것은 정재화 나름의 각오이고 다짐이다. 설두성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정재화가 보여주는 것이 많을수록 설두성의 경계 또한 커지게 된다. 아직은 정재화를 대신할만한 사람이 없다. 방삼통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것을 믿고 하는 도박이지만 위험하다. 정재화가 처음으로 멋있어 보이려 한다. 단지 현실이 그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처럼.
조계 7인방이 정한 중립지대를 우습게 무시하고 농락하는 도야마 아오키(윤현민 분)야 말로 열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제연맹까지 탈퇴한 당시의 일본제국주의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너희들이 무얼 어쩌겠는가. 자신들의 행위를 저지할 어떠한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오판하고 있었다. 적당히 실력행사만 하면 열강은 자신들에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나치독일에 의해 유럽의 본국이 전화에 휩싸이자 그 빈틈을 노려 야망을 키운다. 도야마 아오키의 오만이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오판 자체였다.
중국인 가수의 뒤에서 김옥련은 단지 목소리만 대신할 뿐이다. 모일화(송재림 분) 역시 자조하듯 말한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방의 개가 되어 있었다. 신정태 역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황방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김옥련은 일본군 대좌를 죽은 자신의 죄가 아닌 신정태와 황방을 잡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아무리 노래를 잘부르고, 춤을 잘춰도, 행복한 표정을 지어도, 그것은 김옥련의 것이 아니다. 냉혹한 현실일까? 잔혹한 우화일까?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중국인은 일본이라는 같은 적을 두고 있었다. 함께 싸우기도 했지만 그만큼 서로 오해하고 불신했으며 증오하고 있었다. 싸우기도 많이 했고 서로 죽이기도 했었다. 중국인의 땅이었고 일본인에 떠밀려왔지만 조선인은 침략자와 함께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그나마 세입자조차 아니었다. 드라마는 차라리 낫다. 황방이 방삼통을 나누어주었다. 황방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조선인의 입장에서 황방을 원망한다.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액션이 재미없어진다. 신정태가 권법가가 된다. 차라리 벽을 타고 오르는 비담주벽을 묘사하는 편이 나았다. 와이어에 의지한 연기가 너무 어설퍼 티가 난다. 어설픈 중국무협드라마가 되어간다. 하필 배경도 중국이다. 중국의 상하이다. 멜로는 이제 가야(임수향 분)의 미련만이 남은 상태다. 대신 우화를 본다. 역사와 시대를 본다. 우울하기만 한 현실이다. 미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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