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 한지훈과 김수현의 대립, 법과 정의를 고민하다
법치란 개인에게 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법을 지키는 것이 곧 법치다.
어차피 권력은 법이 없어도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인신과 재물을 약탈하는 것도, 심지어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악인가조차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래서 권력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단순히 보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성문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이 가지는 의의다. 눈을 다쳤다면 상대의 눈을 다치게 하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이를 다쳤는데 그것을 이유로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려 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법에 모든 판단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 이상의 보복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법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그만한 힘을 가진 경우에는 그 행위를 억압하는 족쇄가 된다. 물리적인 힘을 포함한 다른 어떤 형태의 힘이든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을 때 그것을 함부로 휘둘러 필요이상으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을 막는다.
더 나아가 현대의 법은 아무리 피해자라 하더라도 가해자에게 사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보복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자신의 눈을 다치게 했다고 상대의 눈까지 다치게 한다면 상해죄가 성립한다. 이를 부러뜨렸다고 마주 이를 부러뜨린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로 상해죄에 속하게 된다. 사람을 죽였다고 살인범을 마음대로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아줌마 살인자 만들 수는 없잖아, 내가!"
기동찬(조승우 분)이 말한 그대로다. 개인의 존엄과 양심에 대해서까지 법은 배려하려 한다. 인간이 동물을 죽이는 것이 무슨 큰 죄인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매춘인데 어째서 그것이 죄가 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묻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더 가치있게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죽어 마땅한 범죄자가 법에 의해 보호받으며 생명을 이어간다. 심지어 범인인 것이 확실한데도 법에 의해 풀려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것은 옳아야 한다.
인간의 당연한 본능과 감정에 충돌하는 부분일 것이다.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나쁜 짓을 한 나쁜 놈이니 그에 해당하는 응징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니 차를 달려 들이받는다. 딸을 죽이게 될 원수이기에 높은 곳에서 손을 놓아 떨어져 죽게 만든다.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감정이 실린 린치를 가한다. 속이 다 후련하다. 더구나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하고 야비한 모습이 더욱 그런 감정을 가지게 한다. 사형제 존치를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놈은 죽어야 한다.
얼핏 살인범 차봉섭(강성진 분)의 구속여부를 두고 아내 김수현(이보영 분)과 대립하는 남편 한지훈(김태우 분)이 답답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현행범이다. 아내 김수현이 경찰을 도와 겨우 현장에서 잡은 연쇄살인범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흉악한 연쇄살인범을 풀어주라 말한다. 그것도 장차 풀려나게 되면 자신의 딸을 죽일지도 모르는 범인을 풀어주라며 경찰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작진이 의도한 대로 모든 상황과 전개를 지켜보았던 전지적인 시청자의 입장에서의 판단일 것이다. 한지훈은 그것을 모른다.
어쩌면 김수현의 말처럼 차봉섭은 살인범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시청자 자신마저 제작진에게 속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많은 스릴러에서 작가들은 관객, 혹은 독자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무척 즐긴다. 범인이라 여겼던 사람이 사실은 범인이 아니고,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주에 범인으로 밝혀진다. 관객이 이미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뒤집어지며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게 된다. 차봉섭 역시 시청자를 농락하기 위한 제작진의 의도적인 함정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차봉섭을 유죄로 판단하여 증거도 없이 경찰이 억류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무고하게 범인으로 몰려 심지어 유죄로 처벌까지 받아야 했던 많은 경우들에서도 결국 그 시작은 경찰의 그와 같은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신이었었다. 이놈이 범인이다. 이놈 말고는 없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진술을 유도하고, 함정을 파고, 강압과 가혹행위로써 저항의지를 꺾어 놓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경찰이라는 권력과 오랜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끝까지 진실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피의자만이 아닌 증인에 대해서도 그같은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한 짜맞추기는 그동안 수도없이 있어왔었다. 사형대에 서는 순간까지 무고함을 주장했던 사형수 가운데 과연 진짜 억울했던 이가 한 사람도 없었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지훈과 같은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다. 자칫 부당하게 개인의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훼손당하지 않도록. 살인범 차봉섭을 위해서가 아니다. 연쇄살인범 차봉섭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범인이 아닐지 모르는 개인 차봉섭을 위해서다. 어쩌면 차봉섭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수많은 무고한 개인들을 위해서다. 이미 경찰서에 들어서서 조사를 받는 순간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경찰의 조사는 유죄가 확실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의 시작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아무리 잘나가는 방송작가라지만 김수현은 그동안 법과 인권에 대해 그다지 고민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한때 뛰어난 민완경찰이었다고는 하지만 기동찬 역시 그런 내용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소시민이다. 전문적인 지식도, 기본적인 이해도,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도 전혀 기울여 본 바가 없다. 그래서 감정에 휘둘린다. 감정에 자신을 맡긴다. 그나마 경찰 출신인 기동찬은 김수현의 살인을 막으려 한다. 법과 국가를 믿으라. 그에 반해 한지훈은 인권변호사로써 사형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성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이성과 원초적인 감정 사이에서 드라마는 고민한다. 미래를 경험하고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왔다. 전지적 위치에서 판단한다. 이미 보는 순간 범인인 것을 안다. 범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의 인격이나 주위환경, 과거에 대해서도 한눈에 꿰뚫는다. 그 가족에 대해서까지 벌써 남김없이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확신할 수 있다. 죽어야 할 사람과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한지훈의 역할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아직 알 수 없기에 의심하면서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한창 감정이 뜰끓기 시작할 때다. 감정에 자신을 내맡긴다. 이성이 설 자리는 없다.
차봉섭이 죽는다. 김수현을 만나 무언가를 털어놓으려던 차봉섭이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구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체로 발견된다. 트럭까지 동원해 경찰을 막아야 했던 또다른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는 어째서 경찰을 막아섰고 도망치는 차봉섭을 죽여야 했는가. 드라마는 점입가경으로 향해간다. 차봉섭이 가지고 있던 기동찬의 어머니와 조카의 사진은 어떤 의미인가. 김수현이 바꾸고자 했던 딸 샛별의 운명은 과연 바뀔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찾은 지갑에서 꺼낸 사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행히 차봉섭은 죽지 않았다. 김수현은 살인자가 되지 않았다. 기동찬이 김수현을 구한다. 답은 명확하다. 차봉섭을 죽였다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김수현은 살인자가 된다. 살인자로 만들 수 없었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차봉섭을 풀어주려 했던 한지훈의 판단은 어떠한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바른 길인가. 숙제가 무겁다.
차봉섭의 죽음과 관련한 의혹 또한 깊어진다. 누구인가? 누가 무엇때문에 차봉섭을 죽인 것인가? 차봉섭의 살인과 김수현의 딸 샛별의 죽음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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