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 - 회귀, 법과 변호사의 근본을 돌아보다
대단한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숭고한 이상이나 고귀한 신념에 이끌린 것 역시 아니다. 그 점이 더 대단하다. 단지 변호사였다. 변호사라고 하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확신이었다. 의뢰인을 믿어야 하고 그를 위해 최선도 다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이 추구하는 정의를 배반하지 않는 안에서다. 이미 죄가 있는데 그것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후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어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어떻게든 의뢰인을 위해 무죄로 만들어준다. 피해자를 능욕하고, 법정을 조롱하며, 법을 단지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를 위한 유용한 도구처럼 이용한다. 의뢰인을 위한다.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변호사인 자신의 일이다. 자신은 변호사이고, 법이란 변호사인 자신이 의뢰인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요긴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결과 돈과 권력, 혹은 명예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바뀌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스스로 법을 어겼다면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댓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기에 더해 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의 관용을 기대해 보는 것 뿐이다. 어쩌면 정상참작이 되어 감형이 될 수도 있겠고, 더 운이 좋다면 집행유예 정도로 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법이 자신과 의뢰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무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법의 존재 자체를 비웃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김석주에게 있어 그것은 혁명과 같은 변화일 것이다.
죄가 없다면 무죄가 되어야 한다.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변호사가 존재한다. 변호사가 변호사인 이유는 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더 많은 개인들을 대신해서 지켜주기 위해서다. 법이 폭력이던 시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법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심지어 가족의 삶까지 빼앗고 짓밟던 무도한 시대의 이야기다. 그 시절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지키고자 무도한 권력과 맞서 싸우던 이들이 있었다. 김석주의 아버지 김신일(최일화 분) 역시 그런 한 사람이었다. 권력의 도구가 되어 버린 법과 맞서 스스로 죄인이 되어가며 법의 양심을 지키려 했었다.
과거 법은 권력을 위한 도구였다. 법 위에 법이 있었다. 법 밖에 또 법이 있었다. 권력의 필요에 의해 법은 만들어졌다. 권력의 의지를 위해 법은 쓰여졌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권력은 더 이상 법 위에 군림하고 있지 않다. 대신 더 교묘해졌다.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드라마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더 실력있는 변호사를 고용한다. 더 높은 수임료를 지불하고 전관예우가 보장되는 판사출신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에 세운다. 필요하다면 인맥을 동원하기도 한다. 인간인 이상 판사든 검사든 얼마든지 유혹에 이끌릴 수 있다. 때로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합법을 추구하기도 한다. 법이 정의롭다면 그 정의마저 얼마든지 돈과 권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장영우 로펌은 그 대표적인 존재일 것이다. 수억대의 수임료를 지불하는 고객을 위해 진실을 바꾸고 결과를 뒤집는다.
김석주 역시 그같은 장영우 로펌의 수많은 변호사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었다. 누구보다 뛰어났고 따라서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었다. 누구보다 비열했고 누구보다 잔인했다. 누구보다 교활했으며 누구보다 냉혹했다. 그는 항상 승리를 거두었고 그것은 변호사로서의 명성과 막대한 수임료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처참하게 짓밟혀야 했던 약자들의 억울한 눈물과 비명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여겨왔었다. 이기는 것이 정의이며 강자가 정의라고. 그 정의를 자신이 만든다고. 그러나 기억을 잃으면서 그러한 원래의 김석주의 모습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찾은 아버지의 낯선 모습처럼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들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된다. 변호사로서 과연 자신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었는가. 올바른 삶을 살고 있었는가.
과연 김석주는 여전히 오만하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다. 최고라고 하는 자긍심마저 가지고 있다. 다만 방향이 달라졌다. 기억을 잃으면서 이제까지의 자신 역시 잃어버렸다. 장영우 로펌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 장영우 로펌의 방식에 깊이 동의하던 자신을 잃어버린 대신 변호사라는 정체성 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모든 기억을 잃었는데 법에 대한 기억만은 멀쩡하다. 자신의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데 방대한 법조문의 내용에 대해서만큼은 탁월한 기억력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장영우 로펌이라는 타이틀을 제거했을 때 변호사로서 김석주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김석주를 고민하게 만든 내용이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장영우 로펌의 소속변호사라는 신분과 원래의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양심이 충돌한다. 어쩌면 과거 그는 같은 경험을 했는지도 모른다. 햇병아리 시절 누구나 가지는 변호사로서의 양심을 꺾어야 했던 경험이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변호사로서 자신의 양심만을 챙긴다. 그보다는 자부심이다. 자긍심이다. 정혜령(김윤서 분)이 말한 '운명'이라는 단어에 도발되고 만다.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벌까지 받는 것은 결코 운명이 될 수 없다. 운명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고 법칙이다. 그러나 김석주 자신만 나선다면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법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기만과 폭력에 철저히 짓밟히는 정혜령의 모습에 그는 분노마저 느낀다. 정혜령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한 당사자가 또한 김석주 자신이기도 했었다. 법이란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변호사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을 믿을 것이다. 그는 바로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다.
동정하지 않는다. 연민하거나 위로하는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자기 할 말만 한다. 붙잡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도와주겠다며 매달리지도 않는다. 단지 변호사로서 정혜령 자신이 필요로 한다면 그를 위해 법정에서 변호해 줄 것이다. 정혜령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무죄로 만들어 줄 것이다. 필요치 않다면 자신은 이대로 등돌리고 사라질 것이다. 변호사인 것이다. 그는 변호사지 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싸우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있는 사실을 요구하는 의뢰인을 위해 확인해 줄 뿐 의뢰인도 없이 그를 위해 싸워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정혜령 역시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일 게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인간 김석주가 아닌 '변호사' 김석주다.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유능한 변호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의외로 본격적인 법정드라마다. 변호사 그 자체를 다룬다. 법조인으로서 변호사란 존재 자체를 물으려 하고 있다. 법과 이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도. 법조인으로서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역시. 정의란 존재하는가. 우울한 이 사회의 현재를 함께 다룬다. 선한 인간 김석주가 아닌 변호사로서 자신에 보다 충실한 김석주를 전면에 내세운다. 굵직한 과거의 사회적 이슈들도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그 사건들은 어떻게 결론지어졌는가. 거기에서 법과 법조인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 이지윤(박민영 분)도 드문드문 짝사랑중이라 지금으로선 김석주와 얽힐 일이 거의 없다. 작가의 전작 '골든타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바쁜 이들이다. 숨가쁘게 흘러간다.
드디어 변신을 시작한다. 개과천선이라기보다는 회귀에 가까울 것이다.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더 무겁고 냉엄한 주제다. 법은 무심하지만 법을 만든 의도는 따뜻하다.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 누구보다 잔인하고 냉혹했던 악마가 가장 필요할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정혜령은 붙잡고 싶다. 변호사가 되어 그녀를 지킨다. 주제일 것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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