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 - 전지원의 숨은 의도와 김석주 앞에 나타난 약혼녀
전지원(진이한 분)의 어법이 참으로 흥미롭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안이네요."
"차영우 펌은 가장 크고 가장 뛰어난 로펌이고, 제가 법원에서 맡고 있는 사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사건만 도맡는다는 점, 우리나라 정치 경제의 기준을 만들어간다는 점, 매우 매력적입니다. 가지고 오는 사건만을 판단하는 것보다 열정이 넘치는 나이가 가기 전에 선수로서 그런 자리에 뛰고 싶은 마음이 왜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치고는 내용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굳이 현재의 자신과도 비교하고 있었다. 그만큼 더 가치있고 더 매력적인 곳이다. 충분히 그에 대한 욕심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그럴 생각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은 생각이 없는 것으로 해두고 싶다는 표현이었을까?
하기는 차영우로펌에 들어올 경우 누릴 수 있는 기회와 혜택에 대해 차영우(김상중 분)가 설명할 때도 전지원은 예의 모호한 화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연수원시절 보았던 인재들이 차영우로펌에서 어떻게 계발되고 성장해가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김석주(김명민 분)의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차영우로펌이 있었기에 김석주는 타고난 재능에 더해 대한민국 최고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변호사가 김석주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지원 자신은 그런 평범한 변호사로 남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김석주를 다분히 의식하는 발언이었다. 김석주처럼 되고 싶거나, 아니면 김석주를 뛰어넘고 싶거나. 아마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최고라는 자부심과 그 자부심에 어울리는 최고의 대상을 찾아냈다. 동경이었을 것이고 승부욕이었을 것이다. 김석주처럼 되고 싶다. 김석주를 이기고 싶다. 하지만 아직 확신이 없다. 대법관이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친구를 통해 에둘러 차영우로펌에 전하려 한 이유였다. 인정받고 싶었다. 만일 자신에게 그만한 재능과 자질이 있다면 차영우가 먼저 자신을 인정해 줄 것이다. 차영우 역시 김석주의 대신으로, 그의 대항마로서 전지원을 스카웃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준비된 김석주의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이지윤(박민영 분)이 김석주를 만나기 전 먼저 전지원을 만났다. 전지원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김석주와는 하룻밤을 보냈다.(설사 오해에 불과할지라도) 하필 김석주가 기억을 잃고 처음으로 양심을 쫓아 맡게 된 정혜령(김윤서 분)의 사건에서도 전지원은 주임판사로서 함께하고 있었다. 이지윤의 칭찬을 김석주와 함께 나누어 듣는다. 김석주가 기억을 잃고 예전같지 않자 차영우는 김석주의 대신으로 전지원을 염두에 둔다. 김석주도 어쩌면 처음에는 그렇게 차영우로펌에 몸담게 되었을 것이다. 과거였을까? 운명처럼 얽힌다.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였다. 철저히 계산된 관계였다. 결혼이란 거래였다. 그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했는가 의심스럽다. 김석주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유정선(채정안 분)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은 김석주에 대한 염려보다는 김석주라고 하는 최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 권재윤(정한용 분)이 김석주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한 김석주와 결혼한 자신의 가치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엄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며 그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이기도 했다. 그래도 변호사로서의 실력은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그래서 마음놓게 만든다.
그런데 무언가 달라졌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의식적인 배려를 그녀에게 베풀고 있었다. 진지하게 자신들의 과거를 되짚는다.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가? 자신은 과연 약혼녀인 유정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서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 초기화되어 버린 지금 그들의 사이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니 김석주 자신에게 무척 특별한 사이로 여겨지는 것이 어느새 유정선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만다. 유정선 역시 외롭다. 인간의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외가식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외할아버지조차 자신을 도구로 여길 뿐이다. 단지 약혼자에 대한 의무감에 의한 행동일 뿐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유정선을 변화시킨다.
아직 이지윤은 김석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실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같은 변호사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김석주를 동경해서인가. 함께 어려운 사건을 해결했다는 동지적 일체감이었을까? 원래 김석주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 터였다. 사사건건 충돌하며 뒤에서는 그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김석주가 불편하다. 한 편으로 기댄다. 자신의 기대를 거부한 김석주에게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유일한 친구인 박상태(오정세 분)의 말처럼 김석주는 연애라는 것에 서툴다. 오히려 남의 이야기처럼 연기하는 것이 그의 진심처럼 보여진다. 유정선의 감정이 선명해질수록 김석주의 감정도 선명해진다. 이지윤의 감정 또한 명확해진다.
라이벌이란 드라마에 있어 갈등구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차영우에 의해 전지원이 김석주의 대신이 된다. 이지윤이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김석주는 타인의 감정으로 유정선에게 진심을 전한다. 유정선도 낯설기만 한 상황들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뜻밖에 이지윤이 가져온 존속살인사건에 대해 김석주는 단호한 정도로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아직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과정들이 충분히 남아있다. 드라마는 아직 충분히 길다.
새로운 사건이 주어졌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존속살인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혐의로 경찰조사까지 받았다. 어머니는 장애인이었다. 김석주는 과연 어떤 법논리를 펼쳐갈 것인가. 사건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그려내고 싶은 것인가. 현실의 뉴스다. 너무 흔해서 차라리 찬혹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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