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정도전과 하륜, 왕과 왕의 길이 만나다
권력이란 정의로워야 한다. 권력이야 말로 정의로운 것이다. 비로소 하륜(이광기 분)이 정도전(조재현 분)과 마주선다. 권력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마치 운명처럼 그렇게 사소하게 스쳐지나간다. 이후 엇갈리는 두 사람의 행보를 예고하는 듯하다.
정의로운 이가 권력을 가지고 정의롭게 사용한다면 비로소 세상에 정의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이라도 결국 권력을 가지지 못하면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먼저 권력을 가진 이가 그것을 정의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정의가 된다. 흔히 전자를 왕도라 부르고 후자를 패도라 부른다. 권력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든다.
정도전이 추구했던 재상중심의 신권정치란 바로 그같은 왕도사상의 발현이었다. 정의로운 권력이란 탐욕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한다. 부족한 머리와 손발은 신하들이 대신한다. 단지 바른 덕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군주의 자질은 충분한 것이다. 만일 왕이 왕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조선왕조 500년간 대단한 명군은 적었을지 몰라도 다른 왕조에 비해서도 폭군이나 혼군, 혹은 암군이라 할만한 왕이 드물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이다.
바로 정도전이 이성계(유동근 분)를 자신의 왕으로 선택한 이유였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순진한 것을 넘어 거의 무지한 것에 가깝다. 뜻과 행동은 올곧고 바르지만 그것을 현실에 옮기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툴기만 하다.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있으되 그렇다고 크게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그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꺼이 지혜를 빌리고 손발도 빌린다. 어떻게 보면 가장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정도전과 정몽주를, 조선과 고려를 모두 가지려 했기에 얼마든지 자신의 왕위를 향한 욕심조차 한참 뒤로 물릴 수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정도전과 조준(전현 분) 등의 측근들이었다. 이번에는 아들 이방원(안재모 분)이 정몽주마저 죽이고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하륜이 생각하는 권력은 또 다른 것이었다. 먼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했다. 그 권력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했다. 그 권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나중의 문제였다. 권력만 확실하게 중심을 잡아준다면 얼마간의 문제 정도는 크게 무리없이 수습하고 정리할 수 있다. 이인임이 그랬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웠다.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 고려는 안과 밖에서 빠르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혼란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되어 있었다. 이인임이 실각하고 나서가 더 급하고 더 혼란스러웠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권력을 틀어쥐며, 그 권력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이룰 줄 안다. 그것이 정의롭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롭지 않더라도 혼란이 없다면 나름대로 안정은 찾을 수 있다.
그런 하륜 앞에 이방원이 나타난다. 이미 지난 일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충분히 후회하고 있고 아파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다시 되돌리려 하지 않는다. 방해가 되어 치웠다. 거추장스럽기에 정리했다. 필요했기에 행동으로 옮겼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려 한다면 그를 반대하는 모든 개인과 세력을 마땅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의 머리와 손발들을 지키려면 그를 위해하려는 모든 개인과 세력들 또한 마땅히 꺾어 놓아야 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손을 더럽힐 수 있다. 자신의 이름도 더럽힐 수 있다. 기꺼이 오물속에 몸을 담글 수 있다. 무엇도 왕위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와도 맞서며 아버지 이성계까 모르게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공작까지 꾸민다. 집요하고 치밀하다.
이성계와 이방원이 비교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이름을 걱정했다. 세상의 평가를 걱정했다. 자신의 인연들을 아꼈다. 자신과 관계되는 이들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이방원은 버려야 할 것과 가져야 할 것들을 나눌 수 있었다. 모두 가질 수 없다면 가질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겠다. 가질 수 없는 것은 가져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일단 손에 넣은 것은 결코 놓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옳지 못한 일이라도 필요하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탐욕의 화신이다. 집착이며 의지다. 그것이 권력을 향할 때 권력을 가지려 할 것이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니면 모든 것을 놓게 되거나.
정도전과 하륜을 대비하여 이성계와 이방원과의 충돌을 예고한다. 권력을 향한 이성계의 의지와 이방원의 의지가 충돌한다. 정도전의 이해와 하륜의 이해가 충돌한다. 누가 옳았는가. 누가 더 강했는가? 이미 이방원이 승리하고 있었다. 정몽주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조준 등에게는 더이상 대업을 미룰만한 어떤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었다. 죽은 줄 알았던 고려가 다시 살아나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기회를 준다면 다시 누군가 정몽주를 대신해서 자신들을 위협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이방원 역시 대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왕이 되는 것은 이성계지만 그를 왕위에 올리는 것은 이방원이다. 그것이 이방원의 의지다.
세상은 옳은 의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의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더 강한가로 모든 것은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이방원의 의지가 이성계보다 강했고, 이방원의 뜻에 동조한 이성계를 제외한 일파의 의지가 이성계의 것보다 더 강했다. 이성계가 왕이 되지 않으려 한다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벌써 한 번의 패배였다. 정도전마저 자신의 의지를 꺾었다. 정몽주의 죽음에 상심해 떠났던 그가 다시 돌아와 이방원의 뜻대로 이성계를 왕위로 올리는 것을 도우려 한다. 처음부터 그의 의지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의지마저 이방원의 의지가 가로채 버렸다.
사실 무리도 아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방원이 정몽주를, 그것도 대낮에 자객을 보내 살해함으로써 이성계를 따르던 고려의 민심은 급격히 이반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즉위하고 공양왕을 비롯 다수의 왕씨들을 학살하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같은 불안한 정황 때문이었다. 여말선초의 고려에 동정적이고 조선에 적대적이던 여러 민담들은 그같은 민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같은 틈이 이방원이 이성계를 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이방원에 의해 이반된 민심인데 그것이 새로이 왕위에 오른 이성계의 권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습하는 것이 또한 정도전을 죽이고 이성계마저 밀어낸 뒤 왕위를 차지한 이방원 자신이었다. 이미 이방원이 주인공이다.
과연 작가, 아니 배우 유동근의 연기력에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왕위에는 오르지 않겠다며 호통을 치다가도 어느새 혼자서 눈을 돌리고 있는 모습에서 이성계의 복잡한 속내를 읽는다. 이런 식으로 왕위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왕위다.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왕위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유였다. 반드시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그것을 주지 않고 있었다. 정도전이 돌아온다. 이성계가 가장 필요한 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서. 정몽주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다가도 그로 인한 세상의 평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도 모순되기는 마찬가지다. 입체적인 인물이다. 어쩌면 실제의 이성계도 이렇지 않았을까.
어쩌면 역사상 가장 불쌍한 왕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고자 해서 왕이 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원해서 된 왕이 아니었음에도 끝까지 왕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었다. 자신의 대에서 고려왕조를 끝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따라주지 않았고, 결국 폐위된 뒤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다. 능청스럽지만 나름대로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가진 남성진의 공양왕이 그를 그대로 묘사한다. 과연. 명배우 아닌 배우가 드문 드라마다. 마지막 한탄을 쏟아내며 주저앉는 모습은 망국의 비운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백성이 곧 군자다.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선입견도 없다. 그들이 옳다 여기면 옳은 것이다. 그르다 여기니 그른 것이다. 그들의 눈에 이성계란 어떻게 비치는가. 이성계가 세울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여겨지는가. 여러해 전 종영한 '뿌리깊은 나무'에서 밀본의 정기준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백성은 똑똑해짐으로 해서 어리석어질 것이다. 무엇도 권력에 빚진 것 없이 무심하게 보는 무지한 백성의 눈의 무서움을 이야기한다. 배운 밥버러지와 배우지 못한 군자. 사실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정도전이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유였다.
너무 사소해서 차라리 무섭기조차 하다. 너무 크고 무거운 주제인데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지나간다. 왕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어떤 것인가? 옳은 권력이란 과연 어떤 권력인가? 정도전이 있다. 반대편에 하륜이 있다. 이방원이 등장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감탄도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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