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 - 김석주의 빚, 자신의 망령과 마주치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을 마침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눈앞에 있다. 바로 손닿는 곳에 있다. 그런데 꿈이다. 그런데 환상이다. 과연 사람들은 그런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더 간절해진 욕망 만큼이나 더 허무한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하려 할까?
기대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할아버지의 말따위 처음부터 믿지 않았었다.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그래서 더 기대고 싶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따뜻함에. 애써 외면하고 부정해왔던 다정함에. 하지만 그것은 가짜다. 단지 기억을 잃었기에 다정함마저 원래의 자기의 것이라 착각하고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차라리 유정선(채정안 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약해질 것 같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것 같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마지막까지 당당하고 싶다. 자신을 위해 보여준 김석주(김명민 분)의 낯선 다정함에 대한 그녀 나름의 보답이다. 초조하게 김석주가 선물한 약혼반지를 움켜쥐는 모습에서 그녀의 불안과 동요를 읽는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기왕에 이것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자기도 제법 그럴싸한 배역을 연기하고 싶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모르는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인지 모른다. 지나치게 할아버지를 믿었다. 할아버지의 선의만을 믿었다. 더구나 그런 것 치고 그다지 배신감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차라리 체념부터 하고 있었다. 그것이 저들에게 있어 자신의 가치다. 저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유이며 목적이다. 그래서 더 김석주의 진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녀가 받아들이기에 지독하게 기만적인 현실이었다. 그런 건 없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역설이다. 작가의 짓궂은 장난이다. 진짜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상실이니 기억나는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일상에서 흔히 듣는다. 중요한 이슈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들에서,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진심인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려는 뻔뻔한 거짓말인지,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다. 검사의 답답함 만큼이나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김석주의 답답함이 허튼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것일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추악한 이면이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당한 방처럼 황폐하게 어지러진다. 어차피 뭐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니 처음부터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정리하면 될 것이다. 이지윤(박민영 분)의 말이 힌트가 되어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드러나는 자신의 치부에 그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답답함. 그러나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약혼녀 유정선에 대한 자신의 의무다. 아마 그것도 싫었을 것이다. 사랑이 아닌 의무라는 것이.
그를 위한 숙제다. 어쩌면 과거의 김석주 자신이 지금의 김석주에게 남긴 빚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이 계획하고 조언한 일들이 이같은 크나큰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당장 이지윤의 가족마저 그에 휘말린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약혼녀 유정선은 그 모든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되어 법정에서 구속당한다. 김석주 자신 역시 과거 박동현이 저지른 주가조작에 연루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결국 김석주 자신만이 이 모든 상황들을 수습하고 해결할 수 있다. 최고의 변호사로서 그의 선택과 그가 내놓을 해법들이 벌써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필경 그것은 과거의 자신과의 단절을 의미할 터였다. 차영우(김상중 분) 로펌은 김석주가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 그 자체였다. 차영우 로펌에서 차영우 로펌의 방식으로 그는 최고가 될 수 있었다. 최고의 변호사로서 활약하던 자신의 모든 기억이 차영우 로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김석주를 대신하기 위해 젊고 재능있는 판사 정지원(진이한 분)을 애써 스카웃하려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또다른 권력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최고의 로펌과 그와 연계된 최고의 힘들이 그렇게 과거와 함께 지금의 김석주와 대립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김석주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그로 인해 피해입는 사람들이 나타나며 그 싸움은 자신의 싸움이 된다.
당장 김석주를 어떻게든 박동현이 과거 주도했던 주가조작과 엮으려는 검사가 있다. 정혜령 사건에서 무죄를 받아내며 악연을 맺은 검사였다. 그의 손에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남겨진 많은 증거들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만일 모두 사실이라면. 검사의 수사를 피하는 한 편 자신으로 인해 어긋난 것들을 다시 바로잡는다. 이지윤과 그의 가족들을 구하고, 유정선을 구하고, 궁극적으로 지금의 자신마저 구한다. 힘든 싸움이다. 차영우 로펌까지 가세하면 버거운 싸움이 될 것이다. 그가 헤쳐나가야 하는 자신의 업보다. 그래도 벌써부터 김석주의 곁에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아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가 새로이 쌓아올릴 관계이며 기억일 것이다.
유정선을 향한 진심이 차라리 거짓이 되고 기만이 된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자신이면서 또한 자신이 아니다. 그 미묘한 위화감이 긴장을 고조시킨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들이 마치 죄처럼 그를 훔쳐본다. 이지윤이 좌절에서 일어났다. 그녀 역시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간다. 어쩌면 언젠가 깨닫게 될 거짓된 진심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신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진정한 자신을 찾았을 때. 승리는 다름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계기가 다가온다. 차영우 로펌과 김석주가 갈라서는 계기다. 차영우 로펌을 극복해야만 하는 계기다. 전환점이다. 김석주는 자신을 찾고 과거의 자신의 망령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개과천선의 의미다.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과거로는 돌아가지 않겠다.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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