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빅맨 - 자본은 단지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까칠부 2014. 6. 10. 09:13

어쩌면 너무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자본가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동석(최다니엘 분)이 문제인 것이다. 아버지인 강성욱(엄홍섭 본)은 물론 같은 재벌2세 클럽에서도 그와 거리를 두려 한다. 그것이 한 편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마치 봉건시대 영주를 보는 것 같다. 회사란 사유물이다. 자본과 자본의 이익 역시 오로지 개인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무엇이 자신과 회사를 위해 이익이 되는가보다 단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려 한다. 손해가 되더라도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라도 김지혁(강지환 분)을 쓰러뜨려야 한다. 기업과 자본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된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강동석에게 그것은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하다. 일종의 유희다. 그러나 현성유통과 현성유통의 노동자, 그리고 현성유통과 연관된 시장상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여기에서 드라마만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어쩌면 같다. 강동석 역시 생존의 문제였다. 당장 언제 멈출 줄 모르는 심장을 끌어안고 내일의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오늘 하루에만 충실하려 한다. 자본의 이익이든 기업의 성장이든 그에게는 남의 이야기다. 가장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서로 다른 배경을 두고 충돌하는 셈이다.


대삼의 후계자는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이익이 된다면 결혼을 생각하던 강진아(정소민 분)를 뺐어가고 자신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던 김지혁과도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 형이라 여기던 강동석이지만 빈틈만 보이면 얼마든지 물어뜯을 수 있다. 만일 대삼의 문명호(이해우 분)가 상대였다면 김지혁은 그를 이기겠다는 마음초자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적당한 관용과 배려는 날선 증오를 무디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다.


어쩌면 대삼의 문명호는 김지혁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유용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대상으로서. 그는 철저히 객체로써 존재한다. 심장의 이상이 강동석에게서 냉정을 빼앗아가 버렸다. 하마트면 세상에서 사라졌을 뻔한 자신을 대신해 현성의 아들이 되어 있던 그는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이었다. 도플갱어였을 것이다. 김지혁이 더 이상 강지혁이 아니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강동석에게 김지혁은 삶이다. 언제든 자신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다. 끊임없이 의식하고 증오하고 적대한다.


대형마트에서 시장의 시스템을 적용하겠다는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월마트가 결국 토착 대형마트들에 밀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재래시장과 대형마트가 경쟁관계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한국의 소비자에게는 재래시장의 왁자함이나 번잡함이 더 익숙하기도 할 터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형마트의 시스템과 연동할 수 있는가는 문제다. 오히려 백화점과 더 가까울까? 안타깝게도 작가는 중요한 부분에서 생략의 미학을 사용하고 만다. 그것은 전문적인 영역이다. 드라마에는 단지 이미지만이 필요하다. 시청자의 로망과 김지혁의 판타지를 위한 단순한 장치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분열과 그리고 이제는 김지혁 주변의 분열이 등장한다. 자본이 이익을 위해 분열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기업은 계급적으로는 서로 협력관계에 있어도 정작 이익을 앞에 두고는 서로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관계에 있다. 그것이 계급을 자칫 간과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서로 같은 계급끼리 적이 된다. 서로 같은 계층끼리 적대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같은 적을 앞에 두면 서로 뭉친다. 현성유통은 적이 아니다. 김지혁은 문명호에게 필요한 협력자다.


어떻게 김지혁의 주위를 분열시킬 것인가. 방법은 많다. 여러 경로로 알게 된 방법만으로도 김지혁의 주위를 갈갈이 찢어놓을 수 있다. 노숙자에게 취업을 제안한 것은 조금 무리수다. 노숙자에게 가족이 있다. 매우 운이 좋았다. 노숙자의 당상수는 존엄을 잃은 사람들이다. 인간은 때로 너무 어이없게도 스스로 인간임을 잊어버리고는 한다. 낭만적이다. 김지혁도 최소한 노숙자의 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거기서 생겨난 착각이다. 모두가 같지는 않다.


강성욱이 죽기를 바라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양심이 있다. 후회한다.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다시 강성욱을 살릴 것이다. 증오와 분노는 다르다. 강동석을 궁지로 몰고 현성그룹을 무너뜨리는 것이 분노라면, 살릴 수 있는 강성욱을 죽이는 것이 분노다.


강진아의 역할이 중요하다. 무언가 큰 일을 낼 것 같은 캐릭터다. 철이 없는 듯 싶으면서 야무지다. 현성유통의 가장 큰 위기를 강진아의 도움으로 넘기게 된다. 그녀의 샌드위치가 김지혁을 위해 무언가 하게 될까. 사랑받으며 자란 것을 알겠다. 보고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다.


이 사회의 - 아니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다. 보다 냉정한 계급의 논리와 그 가운데 그 논리를 뛰어넘으려는 파격이 존재한다. 김지혁만이 아니다. 강동석 역시 마찬가지다. 재벌 2세 가운데 유독 그만이 튀고 있다. 현성그룹에서도 매우 이질적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되고 있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