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백두산과 장백산, 김수현과 전지현의 CF계약에 붙여

까칠부 2014. 6. 21. 07:32

흔히 간도가 원래 우리영토였음을 주장할 때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그 중요한 근거로 내세우고는 한다. 서위압록(西爲鴨綠)서위토문(東爲土門):서쪽으로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토문강이 북만주의 송화강으로 합류하느 지류라는 사실이 논쟁의 시발이 되었다. 토문강 이남의 땅은 원래 조선의 영토였다.


하지만 정작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던 당시 당사자 가운데 하나이던 조선조정의 기록은 그같은 상식들이 전혀 터무니없는 오해의 결과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던 조선 숙종 38년 12월 7일의 기사다.(인용: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아무래도 직접 국경을 마주하다 보니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을 경계로 심심치 않게 분쟁이 벌어지고는 했었다. 백두산을 답사하던 청의 관리가 습격당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에서는 청나라 사람이 조선사람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더불어 이번기회에 청황실의 발상지이기도 한 백두산을 온전히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의 국경사정요구에 조선조정 역시 매우 신중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정상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둘러 나누어 각각 영유한다는 것이 당시 조선조정의 기본방침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이 당시 청의 관리인 목극등과 국경사정을 논의했어야 할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고령과 쇠약한 몸을 이유로 백두산을 오르는 도중 포기했다는 점일 것이다. 더구나 목극등 자신도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듯 그럴싸한 지류를 발견하자 지레 그것이 두만강의 원류라 단정짓고 자세한 조사도 않고 그대로 확정해 버리고 만다. 상류를 살펴 원류를 확인해야 하는데 조선인 하급관리들만을 보내고 바로 몇 리만을 살피고 서둘러 결론내린 것이 그런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고서도 짐짓 인심이라도 쓰는 듯 원래의 경계보다 북쪽으로 더 올라갔으니 조선의 영토도 그만큼 넓어졌다며 동행한 조선사람들에게 생색내고 있었다. 목극등의 보고에 의해 청과 조선의 국경도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그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와 얽힌 간도영유권분쟁의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자신이 확인한 토문강의 지류가 장차 두만강으로 흘러들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러나 정작 토문강의 지류는 두만강과 섞이지 않고 바로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것을 당시 조선조정도 뒤늦게 확인하고 있었다. 원래는 두만강이 경계가 되어야 하는데 목극등의 성급한 실수로 전혀 엉뚱한 토문강이 경계가 되고 말았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지만 역시 여러가지로 번거로운 사정들로 인해 그냥 흐지부지 그대로 정해진 것이 그로부터 100년 뒤 그를 근거로 간도를 둘러싸고 청과 조선이 대립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그때 바로잡지 못한 실수와 잘못들이 장차 새로운 분란의 씨앗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헤프닝이다.


그런데 다시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며 백두산 자체에 대해서도 경계를 정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상 누구의 땅도 아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청과 조선의 경계인 것은 분명한데 백두산은 누구의 것인지가 아직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것을 정하고자 청조정이 목극등을 파견했고 조선조정 역시 백두산의 정상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누어 경계를 정하고자 방침을 정한 것이었다. 백두산의 정상을 기준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원류가 흐르는 남쪽은 조선의 영토이고 그 북쪽은 청의 영토다. 다시 말해 백두산의 북쪽은 청 - 아니 청을 계승한 중국의 영토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장백산(長白山)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김수현과 전지현 두 배우에게 가해지는 비판들이 부당하다 여겨지는 이유일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의 영토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청과 국경을 나눌 때 백두산은 그 기준이 되고 있었다. 백두산 가운데 북쪽은 청의 영토이고 남쪽은 조선의 영토다. 당시의 국경을 지금의 대한민국과 중국정부는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특히 해방이후 북한과 중국사이에 맺어진 조중변계조약은 백두산을 여전히 중국과 북한이 나누어 영유함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고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을 굳이 의식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한국인은 백두산이라 부르는 산을 중국인은 장백산이라 부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혹시 모른다. 만주족 가운데 백두산은 원래 만주족의 영토였으니 한족의 중국은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봐야 만주족이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것을 부정하자면 조선왕조실록과 백두산정계비마저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장백산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백두산이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닐텐데도.


영토에 대한 영유권주장은 그만한 역사적배경을 필요로 한다. 그에 합당한 타당한 이유와 근거들이 있어야 한다. 중국이 백두산의 이름을 장백산으로 바꾸어 뺏어가려 한다. 정확히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장백산이고 중국은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 뿐이다. 더구나 우리의 영토도 아니다. 북한에 의해 점유된 북한의 영토다. 이미 한국인의 다수는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동포로 여기고 있지 않다. 통일에 대한 의지도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민족주의에 의한 잘못된 프로파간다의 잔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된 순간 이미 끝났어야 하는 논쟁이었다. 간도는 누구의 영토인가. 백두산은 누구의 것인가.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인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같은 대중적 정서를 읽지 못한 정도일 것이다. 실제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잘못된 상식에 의한 감정적 선동이 또다른 희생양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냥 감정에 못이긴 한바탕 소란이고 소동이다. 


산이 하나 있다. 과거 누구의 것도 아니던 산이었다. 서로 자기의 것이라 주장한 두 나라가 있었다. 서로 마주보고 북쪽은 장백산, 남쪽은 백두산이 되었다. 모두 하나의 산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단지 어느쪽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질 뿐이다. 우리는 백두산이라 부르고 그들은 장백산이라 부른다. 하나의 산이다. 하나의 사실이다. 진정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