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개과천선 - 로비스트, 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까칠부 2014. 6. 26. 06:44

사실 은행쪽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었던 사건이었다. 설마 누가 그렇게 단기간에 환율이 폭등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말이다. 정부의 환율정책 때문이었다. 고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이 늘어야 하고,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고환율이 필요하다. 환율주권을 내세우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미국발 경제위기로 인해 불안하던 외국인투자자들의 투매심리를 부추겼다. 뒤늦게 수백억달라를 쏟아부어 환율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국제환투기자본만 좋은 일 시켜주고 말았을 뿐이다. 900원 하던 환율이 1500원까지 올라갓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미국발 경제위기와 끝모를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던 중동의 정세는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있었다. 위안화와 엔화 모두 달러화에 대해 강세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오로지 대한민국에서만 달러의 가치가 치솟고 있었다. 정부의 섣부른 환율개입으로 인해 추락하고 있던 달러화의 가치보다 원화의 가치가 더 추락해버린 결과가 바로 키코였던 것이다. 아마 원래 예상대로였다면 설사 환율이 상승해서 손실을 입더라도 그 규모가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판결문의 내용 역시 그런 점을 상당부분 반영했을 것이다. 계약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환율의 급상승은 예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김석주(김명민 분) 역시 처음 키코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 되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외환시장의 경우 변수가 많고 예측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3년이라는 계약기간은 너무 길고 위험부담도 크다. 1년, 혹은 2년의 계약기간이라도 그 사이 세계의 어느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른다. 만에 하나 환율이 폭등하게 될 경우 기업이 입게 될 피해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하기는 그렇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환율이 급등할 것이라 여기는 중소기업인은 드물었을테니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판결의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된다. 상품 자체의 결함도 결함이지만 그 결함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수단이나 과정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다고 아주 틀린 판결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 최고라 인정받는 대법원의 대법관들이다. 법리적으로 충분히 고려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김석주가 아쉬워하는 것은 소수의견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감한 사건이다. 서로 다른 입장과 논리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편에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대법관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미 김석주 자신도 대법관의 면면을 살피며 그리 지적한 바 있었다. 모두가 크게 다르지 않다. 차별성없이 비슷한 성향의 판사들이다. 무난하게 크게 튀지 않는 판결만을 무리없이 내려온 판사들이다. 전지원(진이한 분)도 말한다. 다른 판사의 눈치를 보며 대세를 쫓아가려는 판사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김석주도 이미 알고 있었다. 박상태(오정세 분)도 알았다. 당연히 차영우(김상중 분)나 전지원도 판결에 대해 이미 짐작을 넘어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내용이 문제였다. 그렇더라도 설마 소수의견이라고는 없는 전원일치의 판결이 내려질 줄이야. 단지 여러 의견 가운데 입장이 갈린 정도가 아니다. 단지 여러 가능성 가운데 우세한 하나가 선택되어진 것이 아니다. 정의가 부정당한다. 자신이 믿고 있던 법의 정의가 배신당한다. 한국사회에서 - 대한민국의 사법부에서 김석주 자신이 믿고 있던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법의 정의라는 것을 믿어보려 했었기에 그 충격도 컸을 것이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김석주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 당연하게 해오던 일이기도 했다.


차영우로 말한다. 변호사란 로비스트다. 법은 사람이 만든다. 법을 적용하는 것도 사람이다. 의뢰인과의 사이에서 그 중개역을 맡는다. 법이 아닌 사람을 움직여 의뢰인을 위한 최선의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한다. 법정에서 변론을 통해 의뢰인을 위해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노력하는 행위 또한 결국은 논리를 통해 판사의 판단을 유도하는 로비의 일환일 것이다. 조금 더 스케일이 크게 법정 밖에서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검찰과 판사, 언론,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인간이기에 유혹에 약하고 관계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법조인의 현실을 말한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이후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법부 밖에서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도 사법부 안에서의 관계가 남는다. 전지원이 절망한 이유다. 고작 출세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 사는 세상에 법 역시 사람에 좌우된다. 악랄하다고 할 정도로 의뢰인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김석주가 어느새 약자의 편에서 법과 정의를 위해 싸운다. 많은 이들로 하여금 원통한 눈물을 흘리게 만들던 김석주의 능력이 이제는 약자를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판사로서 유능했지만 그 유능함은 차영우 로펌으로 들어가 비싼 수임료를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대법원을 움직이는데 쓰이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정확히 사람의 욕망을 움직인다. 전지원을 스카웃한 것도, 검찰과 법원의 인사에 개입한 것도, 결국 차영우 로펌이 가진 욕망, 즉 힘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란 모든 것이고 그것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외국계 투기자본에 의해 있는대로 휘둘리며 약탈당하는 국내의 자본과 기업들을 위해서. 법이 방패막이 되어야 한다. 무차별한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국내의 기업과 기업인들을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백두그룹의 진진호(이병준 분) 회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지만 개인의 감정과 정의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진진호와 같은 이들조차 보호받지 못한다면 누구도 보호받지 못다. 결국 키코의 피해자들 역시 국제자본의 횡포에 놀아난 경우일 것이다. 은행도 승자가 아니다. 진짜 이익을 본 것은 그들의 뒤에 있는 외국계 자본들이다.


갑작스럽게 거창하게 흘러간다. 아니 원래 거창한 드라마였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는 성폭행이고 살인사건이지만 '개과천선'에서 다루어지는 순간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뒤바뀌고 만다. 대기업과 그 후계자가 연관되고 인기연예인이 그 당사자가 된다. 하물며 경제사건은 그 스케일부터 다르다. 직접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좌절로 내몰리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단위부터 다르다. 진진호 회장 개인의 경영권 상실이 백두그룹 종업원들의 장래와 연결된다. 당장 노조부터 정리해고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영웅이 된다. 불의를 바로잡고 악의를 막아서는 사법의 영웅이다. 다만 남은 분량이 그리 넉넉지 않다. 영웅의 탄생일까?


영웅이 되기에는 평범하다.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처음 차영우로펌에서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의 날선 세련됨과 비교된다. 그가 속한 곳이다. 그가 서게 될 것이다. 유정선(채정안 분)과 함께 들른 오래된 중국집이 그것을 말해준다. 노력해 보고 싶다. 지금의 김석주와 함께 노력해 보고 싶다. 의식적으로 계급의식을 드러낸다. 진진호 회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진진호 회장이 건넨 거액의 수임료를 위해서도 아니다. 진정한 개과천선이다. 아주 오래전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권력에 의해 짓밟히던 자신의 집으로. 어쩌면 오랫동안 간직해 온 부당함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마치 어린 손에 쥐었던 마루의 흙처럼.


러브라인이 아주 간략하게 정리된다. 이지윤(박민영 분)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없다. 유정선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약혼녀다. 약혼녀였다. 의리일 테고 책임감일 것이다. 노력해보겠다. 아직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로서 한때 약혼까지 했던 상대에 대한 최선을 다하려 한다. 법정이라고 하는 첨예한 전장을 중심에 둔 전문드라마에 어울리는 상당히 건조한 - 그러나 깔끔한 마무리다. 드라마의 중심은 법정이고 변호사사무실이지 남녀의 애정관계가 아니다. 물론 조기종영에 따른 생략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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