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 그게 뭐가 나빠? 그냥 그림인데...

까칠부 2014. 7. 31. 06:40

초반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 


"그게 뭐가 나빠? 그냥 그림인데..."


맞는 말이다. 그냥 섹스가 싫을 뿐이다. 섹스를 싫어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런데 오히려 그때문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만다.


바람을 핀 것은 상대였다. 연인이던 최호(도상우 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이후 모든 소란들의 시작이었다. 장재열(조인성 분)이 그것을 보았고 모두의 앞에서 까발렸다. 가장 상처입은 것은 그래도 연인인 최호를 위해 자신의 오랜 상처를 어떻게든 딛고 이겨보려던 지해수(공효진 분)였을 것이다. 그러나 최호는 그런 지해수를 비난한다. 지해수가 300일 동안 섹스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해수도 부정하지 않는다. 최호가 정상이고 자신이 비정상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키스를 견뎌보려, 섹스도 참아내 보려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일종의 강박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병을 더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하는 강박이, 더구나 그 이유를 알기에 원인이 되었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 상처를 헤집는다. 의식할수록 섹스는 더욱 두렵고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상처와 함께 각인된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항상 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 앞에 있다고 항상 성욕을 느끼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직 그럴만한 대상을 만나지 못했다. 아직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최호 역시 고작 그런 정도의 상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억지로 키스하고 필사적으로 섹스해야 하는 그런 상대다. 그런 욕구나 충동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는 그저 그런 상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욕구가 생겨나기를 기다려 남들처럼 거스르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더라면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았을까. 원인도 알고 치료방법도 안다. 결국은 자신의 증상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현상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성기에 집착하는 본드흡입환자에 대한 장재열의 반응은 그같은 지해수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정상에 대해 집착한다.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똑같은, 정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무엇에 대한 강박이다. 성기를 좀 그리면 어때서? 그것은 한 편으로 장재열 자신을 위한 변명이기도 하다. 지해수와 장재열이 성기에 집착하는 한 소년을 통해 서로 만나게 된다. 지해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고, 장재열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을 주는 장재열의 소설들은 역시 장재열이 가지고 있는 상처들에 대한 나름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치료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긍정하는 것이다. 성기를 그리는 것도, 그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런 때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지해수에게 결여되어 있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긍정하는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다만 장재열 역시 자신의 강박에 대한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 그를 현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지해수가 정상에 집착하다면 장재열은 비정상에 집착한다. 그래서 쉽게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긍정할 수 있다. 자신을 긍정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성기에 집착하던 소년처럼 그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내면을 드러내려 할 뿐이다.


아니 긍정이라기보다는 도피일 것이다. 정면으로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그것을 긍정하기보다 외면한 채 그저 괜찮다며 자기를 위로하기에 급급하다. 갑작스럽게 바뀐 그의 소설들은 그런 자신을 향한 절규였을 것이다. 자신이 외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자신을 위한. 그런 자신조차 긍정하고 마는 것은 그 이상 앞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마저 긍정하며 현재에 안주해 버린다. 하기는 어쩌면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난 뒤 장재열은 더이상 전과 같은 소설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창작이라고 하는 자체가 성기에 집착하던 소년의 그것처럼 상처의 균열에서 비롯된 절박한 절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괴팍한 작가의 이미지란 바로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부정적이기에 긍정적이다. 비관적이기에 낙관적이다. 어차피 안 될 것을 안다면 안되더라도 그다지 나쁠 것은 없다. 어차피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결국 아닌 것을 알더라도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친구에 배신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친구의 어리석음에 화를 낸다. 친구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단지 자기가 눈치가 없어서 그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지해수와 결국은 닮았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도 장재열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영악하기를. 그나마 자기의 욕심이라도 제대로 챙겼기를. 어차피 그런 것이 인간이고 또한 세상이다. 장재열이 살아가는 세계다. 차라리 놓아 버린다.


긍정적이기에 부정적이다. 낙관적이기에 비관적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에 그렇지 못한 것들에 실망하고 상처입는다. 그럴 수 없는 현실이 그녀를 주저앉히고 만다. 환자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지해수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쉽게 냉정해진다.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라는 정상을 그들에게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화내고, 쉽게 실망하고, 그래서 쉽게 상처준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머니를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부정에 대한 충격이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로 나타난다. 자신마저 용서하지 못한다. 지해수의 세계다.


참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작이 없고 끝이 없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며, 부정적이고 긍정적이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간다. 그것도 아주 필사적으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그래서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상처가 덧나고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면서도. 비를 맞으며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지해수의 모습은 그래서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같은 필사적인 노력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제목의 뜻 그대로다. 사랑이란 궁극의 긍정이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게끔 해준다. 어머니가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까지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장 힘든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하는 것일까?


주제가 드러났다면 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써 그것을 실체화해야 한다. 이후의 드라마가 기대되는 이유다. 어떻게 그들의 상처는 사랑으로 이어질까?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끝내 치유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