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새정연의 치명적 한계...

까칠부 2014. 8. 29. 00:55

투사들이다. 투사의 본질은 싸우는 것에 있다. 길들여지면 더이상 투사가 아니다. 적은 물론 아군과도 싸운다. 더이상 싸울 상대가 없을 때까지 싸운다.

 

더구나 그 가운데 상당수가 리더였었다. 머리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이끄는데 익숙하지 남들에게 이끌리는데 익숙지 않다. 그래서 너도 나도 머리가 되려고만 한다.

 

민주주의의 전제는 승복이다. 정치의 목적은 질서에 있다. 다양성도 좋다. 다양한 의견이 함께하는 것은 분명 옳다. 하지만 일단 결론을 내리고 방향을 정했으면 그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음을 기약하고 지금은 일단 내려진 결론에 최선을 다한다.

 

새누리당은 그게 된다.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다. 깔끔하거든. 세련되다. 그에 반해 새정연은 어수선하다. 정돈되지도 않았고 자꾸 잡음만 들린다. 이놈들에게 뭘 맡긴다고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나마 새누리당에 대한 비토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지지율이나 유지할 수 있을까.

 

즉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다. 오늘 이랬다가 내일은 또 달라질지 모른다. 이번 세월호 협상만 해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입장을 뒤바꾼다. 무려 두 번이나 입장을 바꿨다. 그러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박영선이 스스로 용퇴하는 결단을 보였어야 했다. 그래야지 이제까지의 새정연의 실책을 원점으로 돌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박영선이 남아 있는 이상 새정연의 실책은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어째서 새정연을 통하지 않고 새누리당과 직접 협상하고 있을까?

 

기대가 없으면 지지도 없다. 지지란 자체가 내일에 대한 기대다.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한 기대가 지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내일을 믿을 수 없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지지할 수 있을까?

 

차라리 강경한 야성을 기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야당다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것으로라도 기대할 수 있게 하라. 그조차도 안되는 것이 지금 새정연의 수준이다.

 

워낙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과거 참여정부 시절 극단의 대립 끝에 분열되었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하여 생긴 정당에, 다시 안철수를 중심으로 주변인물들이 더해졌다. 계파가 복잡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 역시 깊다. 신뢰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새정연의 미래는 없다. 오히려 외부가 아닌 새정연 내부에 자신들의 적이 있다. 그런데도 정당을 유지하는 자체가 차라리 기만일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니 아예 살을 도려내야 한다.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거쳐 투명하게 당론을 정하되 원칙을 어기고 해당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해야 한다. 당장은 의석도 줄고 여러가지로 불리하겠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이 새정연의 안정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경쟁은 공정하게 하되 경쟁의 결과에는 모두가 승복한다. 하나의 결론이 내려지면 그것은 철저히 지킨다. 약속이다.

 

답답하다.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당사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모른다. 자신에게 돌아올 손해가 두렵다. 피해가 두렵다. 외면한 채 그저 현상유지에만 급급하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정권심판론에만 매달려, 세월호 유가족도 일반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 얕고 짧음이 거기서 비롯된다.

 

제대로 된 정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할까? 그래서 지지하지 않는 것이지만. 한심할 따름이다. 답이 없다. 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