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공인과 공적 의무...

까칠부 2014. 9. 21. 16:25

하다못해 연예인에 대해서조차 그런 주장들을 한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따라서 연예인에게 사생활이란 없다. 미국에서 파파라치와 관련해서 재판이 열렸을 때 그와 비슷한 판결이 내려졌던가 했을 것이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란 역시 공적 관심의 대상이니 그를 대중에 알리는 것을 사생활침해라 여길 수 없다.


그나마 연예인은 자신과 직접 이해관게가 없다. 그래서 나는 공인이라기보다 공적 대상이라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다르다. 내가 사는 지역구의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이나 하물며 대통령이라고 하면 내 삶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되고 어떻게든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권력에 대한 유언비어가 생겨나는 구조다.


과연 저 정치인, 혹은 권력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그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과 주위의 일상을 공개함으로써 대중에 영합하려는 권력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친근감은 일체감이 되고 권력의 존재를 어느새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개인의 사생활은 때로 권력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대중으로부터 차단하려 시도한다. 권력이 대중과 유리된 신성이던 시절 쓰이던 방식이다. 대중은 권력에 대해 알아서도 알려 해서도 안된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보고가 들어가고 행정부를 지휘해야 할 수반인 대통령이 그 흔한 회의조차 한 번 없이 7시간이나 실종되어 있었다. 7시간만에 나타나서도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알고 싶다. 수백명이나 되는 생목숨이 사라져가던 그 시간에 대통령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수백명의 목숨보다 우선해야만 했던 것인가.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사생활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변명만이 있을 뿐.


그러니 온갖 구구한 억측들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다지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당연하다. 결국 당사자나 주위에서 확인해 주어야 그것은 사실이 되는 것이다. 추측은 단지 추측일 뿐 사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궁금증을 충족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생활마저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단지 사실과 다르기에 처벌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가 사실을 먼저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제왕조인 조선에서도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사관과 승지에 의해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기록되어 남겨지고 있었다. 그것이 왕이 된 자의 의무였다. 개인의 사생활이지만 왕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선 전체에 영향이 미칠 수 있기에 나중에라도 그것을 보고 바른 이해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불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용인했다. 그것이 왕이라는 권력이 가지는 책임이니까. 어떠한가?


카톡마저 감시하려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유언비어를 만드는 것은 물론 퍼뜨리는 것까지 수사하겠다고. 그것이 싫으면 권력을 가지지 않으면 된다. 권력은 누리고 싶고 그에 따른 책임은 지기 싫다.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권력에 대한 관심은 때로 잘못된 정보를 생산하는 왜곡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 투명하게 납득할 수 있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어떠한가.


답답할 뿐.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기는 한 것인가. 과연 권력에 대한 유언비어가 처벌받는 예가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 존재하던가. 하지만 바로 그것이 국민의 선택이니까.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갖는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한숨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