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비내리는 영동교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마음
그사람은 모를꺼야 모르실꺼야
비에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
하염없이 걷고있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
잊어야지 하면서도 못잊는 것은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헤매도는 이마음
그사람은 모를꺼야 모르실꺼야
비에젖어 슬픔에 젖어 아픔에 젖어
하염없이 헤매이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
생각말자 하면서도 생각하는건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원래 가요라 하면 트로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포크는 포크, 록은 록, 디스코는 디스코, 가요는 가요. 그러고 보면 트로트라고 장르를 특정하여 부르게 된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확고부동해보이던 대중가요로서의 트로트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젊은 세대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다. 경제성장과 맞물린 미디어의 발달은 새로운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게 보다 쉽게 해외의 최신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트로트는 그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즐기는 구닥다리로나 여겨질 뿐이었다. 전통의 가요를 현대화하려던 많은 시도들은 트로트와 다른 대중음악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발라드라고 하는 장르가 확정되기 전 80년대 유행하던 많은 노래들은 트로트 특유의 뽕끼가 가미된 슬로우고고 리듬의 미디움템포 음악들이었다. 아마 그래서 유현상은 지금도 '가요'를 부르던 당시의 자신의 노래들에 대해 미디움템포라 정의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트로트가 아니다.
스탠다드와 재즈, 블루스, 탱고, 컨츄리, 디스코, 록의 연주와 사운드는 로꾸뽕이라 일컬어지던 트로트고고로 발전하고 있었다. 록사운드 안에 트로트 특유의 뽕끼를 받아들이고, 포크의 멜로디에도 민요와 트로트의 멜로디가 섞여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80년대 정립된 발라드라고 하는 장르가 그같은 한국 대주음악의 현대화를 위한 많은 노력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트로트라고 하는 원래의 '가요'가 소외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일요일 오전시간에 무려 국영방송에서 공중파를 통해 트로트의 위기를 진단하는 방송을 내보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더 이상 트로트를 듣지 않는다. 트로트가 설 곳을 잃어간다.
하기는 그러고 보면 트로트의 중흥기 - 나아가 뉴트로트의 시대를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주현미의 데뷔 역시 운전자들을 상대로 판매되던 메들리테이프를 통해 데뷔하고 있었다. 기존의 히트곡들을 운전자들의 기호에 맞춰 재편곡한 메들리테이프는 철저히 도로위에서만 소비되던 마이너시장이었다. 한때 대중음악 그 자체를 가리키던 지배적 위치에서 소수의 특정계층만이 전유하는 주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마이너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것이 '쌍쌍파티'의 주현미였다. 원래 조미미라는 가수가 부르기로 한 것을 마침 녹음실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동네약국 주인 주현미가 부르게 되었다고. 그것은 어쩌면 기적이기도 했다. 주현미 자신에게나, 한국의 트로트에 있어서나.
어쩌면 트로트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여러가지 특징들이 바로 주현미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로 꺾기와 간드러지는 비성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와 같은 창법은 있어왔었다. 하지만 주현미에 이르러 맺힌 곳 없는 투명한 목소리와 흥겨운 리듬들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트로트를 상징하는 무엇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얼마나 잘 꺾는가. 얼마나 비성을 잘 쓰는가. 그리고 얼마나 비브라토가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가. 트로트고고에서 이어진 흥겨운 리듬은 더이상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도 슬픈 표정을 짓지 않게 만들었다. 양식화되고 장식화되며 지금까지 트로트가 담당해 오던 많은 역할들을 다른 장리에 양보하게 되었다. 더 이상 트로트는 시대와 사회와 개인의 감성을 담아내지 않게 되었다.
트로트는 트로트가 되었다. 트로트만의 형식과 트로트만의 양식과 트로트만의 정서와 트로트만의 창법. 다만 그로 인해 여러 대중음악 장르의 하나로써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인정받게 된 공은 크다 할 수 있다. '가요'가 아닌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서 그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가장 크게 성공한 박현민과 장윤정은 그같은 현실의 단면일 것이다. 트로트라고 하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그런 특징들이다. 그렇게 고사의 위기에서 트로트는 다시 한 번 대중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트로트의 역사에서 주현미의 존재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중견들마저 주현미의 성공에 힘입어 다시 대중 앞에 나설 수 있었다. 새로운 신인들이 속속 대중에 자신을 알릴 수 있었다. 대중음악차트에서 트로트차트가 따로 집계될 만큼 트로트의 새로운 전성시대였다. 그 주역이었다. 주현미가 아니었어도 가능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때 트로트의 부흥을 이끈 것은 다름아닌 주현미였다. 그로부터 트로트를 정의하는 여러 요소들이 정립되고 있었다.
구슬프다. 민요인듯. 엔카인듯. 아니면 중국의 전통음악인 듯. 그러면서도 흥겹다. 맺힌 곳 없는 주현미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뻗어간다. 쉽고 간결한 멜로디와 그만큼이나 쉽고 직관적인 가사가 한 번 듣고도 그대로 따라부를 수 있게 한다. 물론 누구도 주현미 같을 수는 없다.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쌍쌍파티'와 '리듬파티'처럼 어느날 그렇게 '비 내리는 영동교'는 자신도 모르게 내 입을 점령하고 있었다. 일상의 노래는 쉬워야 한다. 이후 주현미의 여러 히트곡들처럼.
한 물은 커녕 서너 물은 더 같 구닥다리 음악에서 아직 어린 나이에서도 곧잘 즐기는 대중음악의 하나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 지배적 위치는 잃었지만 여전히 대중의 마음을 달래주는 대중음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여전히 현역이다. 여전히 새로운 음악을 하고 있다. 당시도 무척 새로웠다. 지금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