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 - 견뎌야 하는 삶의 고단함에 대하여

까칠부 2014. 11. 1. 04:01

군대가면 사람 된다. 그 말의 뜻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떤 불합리와 부조리가 있어도 참아야 했다. 눈감고 입다물고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야 했었다. 그런 것을 군생활 잘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을 알았다. 옳지 못한 것을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릇된 것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피할 궁리만을 하게 된다.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질책과 야단은 당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피할 궁리만을 하게 만들 뿐이다. 이 모든 일들의 발단은 자원팀 마부장(손종학 분)의 야단을 피하고 싶은 정과장(정희태 분)의 뒤를 생각지 않은 변명에서 비롯되었다. 아마 오상식(이성민 분) 과장이 말만 잘 맞춰주었다면 오상식 역시 약간의 비난만을 듣고 문제없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상식이 그런 성격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그만 오상식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장백기(강하늘 분)는 알고 있었다. 안영이(강소라 분) 역시 자신이 직접 찾아보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기는 오상식 역시 과거 부하직원이 억울하게 업무과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직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침묵하고 있었다. 최전무(이경영 분)의 눈밖에 나면 승진은 커녕 당장 내일 일자리부터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식이 셋이다. 아내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가족의 생계가 오로지 가장인 오상식 한 사람에게 달렸다.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안영이가 마부장의 명백한 성희롱 발언을 듣고서도 감히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말하는 것조자 꺼려하고 있다. 그깟 알량한 양심 때문에 어렵게 얻은 직장을 포기해야겠는가.


그러고 보면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적다. 양심 하나와 자기 자신 정도면 조금 아쉽기는 해도 그럭저럭 손해는 보지 않는다. 아직 많은 남들이 남아 있다. 원인터네셔널 같은 대기업은 힘들지 몰라도 자신의 실력이면 어디가서든 인정받을 자신도 있다. 다만 장그래(임시완 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에게는 오상식 과장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호의라는 마음의 빚이 있다. 놓아두고 온 자신의 시간들이 있다. 양심보다 그 마음의 무게가 더 장그래에게는 걸린다. 무모하다. 그 무모함을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끝내는 것은 어른의 연륜일 것이다. 오상식 과장 역시 정과장을 막다른 궁지로 내몰지는 않느다.


여자이기 때문에. 아마 주위에 직장생활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여성을 고용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1시간 30분 정도 쉬지 않고 떠들어댈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지 않는다 말한다. 하지만 여성들 역시 남성들과 똑같이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스펙을 갖추고 실력을 쌓았다. 여성이라고 남성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쓰는 돈이라고 남성의 그것과 다른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생활에서 차별을 받는다. 아이를 가지면 그것이 회사와 동료들에게 피해가 된다며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하는 상황들을 강요받게 된다. 혹은 자신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그만두고 만다. 아이를 하나 더 낳는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포기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결심이 쉽겠는가.


남녀를 불문하고 사원 대부분으로부터 신뢰가 두터운 선차장(신은정 분)이지만 그러나 그녀 역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버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당장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일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일찌감치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중요한 일까지 뒤로 미뤘건만 정작 그날이 되니 남편은 다시 자기 사정만 내세운다. 그렇다고 다시 중요한 업무를 뒤로 미루고 아이를 데리러 갈 수도 없다. 일인가? 아이인가? 그러고서도 집으로 돌아오면 대부분의 집안일은 그녀의 차지다. 만일 선차장이 잔업이나 야근이라도 하게 되면 집안일은 누가 하게 될까? 맞벌이라고 집안일까지 부부가 나눠하는 경우든 아직은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오죽하면 안영이에게 일을 계속 하고 싶으면 결혼하지 말라 조언하겠는가. 그 순간 선차장은 차장이 아닌 같은 여성인 직장의 선배로서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 있었다.


현실이 그런데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명백한 성희롱 앞에서 선차장은 부장이라는 상대의 직급에 밀려 그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으로 항의를 대신한다. 임신한 상태에서도 벌써 3주째 새벽출근에 야근까지 하고 있었다. 가장 건강에 유의해야 할 시기에 결국 과로로 회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걱정보다는 그로 인해 늘어난 일과 부서에 끼치는 피해만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임신한 자체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그것을 선차장이나 안영이나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한다. 업무시간 이외의 시간에도 강제로 회사에 나와 일하는 것이 반드시 정상은 아닐 텐데도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자신이 그에 맞춰가야 한다. 선차장 역시 겪어 온 과정이다. 그것이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길이다.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렇게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하다.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며, 태연히 다른 사람을 상처준다. 그런데도 참아야 한다.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것. 그래서 사람은 만나고 위안을 얻는다. 그래도 회식이 아닌 일 끝나고 개인적으로 만나 기울이는 소줏잔이 작은 위로가 되어 준다.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다룬 만화나, 드라마, 혹은 영화 등에서 유독 소줏잔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온기가 필요하다. 장백기가 안영이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안영이가 장그래를 의식하는 이유들. 그들은 지금 전장에 서 있다.


무척 시리다. 벌써 가울도 저물어간다. 이제 곳 첫서리와 첫눈소식이 들려 올 것이다. 싸한 찬 바람이 스미는 작은 대폿집에서 뜨거운 국물을 안주삼아 소줏잔을 기울인다. 내일은 생각지 않는다. 오늘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그런 고단한 넋두리들이 TV를 통해 들리는 듯하다. 모든 힘들고 보람찬 시간들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하여!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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