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칸타빌레 - 캐릭터드라마, 관계가 캐릭터를 잡아먹다
일본드라마는 캐릭터에 집착하고, 한국드라마는 관계에 집착한다. 캐릭터가 곧 이야기가 되고, 캐릭터를 중심으로 관계를 쌓아간다. 치아키 신이치이고 노다 메구미이면 될 것을 차유진(주원 분)과 설내일(심은경 분)의 주변의 이야기가 자꾸만 쌓여간다. 슈트레제만(백윤식 분)을 몰아래려는 도강재(이병준 분)의 음모에 이어 다시 사랑과 음악 모두에서 차유진과 라이벌이 되는 이윤후(박보검 분)의 캐릭터까지 추가된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일까?
주변은 어디까지나 주변일 뿐이다. 조연 역시 단지 조연에 불과하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은 당연히 주인공이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주인공이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리기만도 바쁘다. 사랑은 그들을 성장시키는 촉매이자 마침내 그들이 이르게 될 목표다. 원작이 크게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과정이 치밀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캐릭터 드라마라는 것일 게다. 캐릭터의 매력이 곧 드라마의 매력이며 캐릭터의 인기가 곧 드라마의 인기다. 그러나 역시 한국에서는 그보다는 복잡하게 꼬인 관계가 더 중요해진다.
관계에 잡아먹힌다. 스승 슈트레제만에. 슈트레제만을 혐오하는 도강재에게. 그들의 배후에 있는 이시장과 학장의 관계에. 마치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 듯하다. 슈트레제만과 도강재의 사이에 소품처럼 설내일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차유진마저 그들의 관계에 휘둘리며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고민으로 내몰린다. A오케스트라는 아예 거의 비중도 없이 흘러가고 S오케스트라와의 의미없는 갈등으로 분량을 잡아먹는다. 그런 질척거림이 한국드라마만의 장점이기도 할 테지만, 그러면 처음 산뜻하고 명쾌하던 차유진의 캐릭터는 어디로 간 것일까? 표정이 풍부해져서 좋아졌다 여겼더니 이러기 위해 표정이 깊어진 것이었다.
아예 정극으로 가려 할 것이면 노선을 분명히 하던가. 설내일을 제외하고 - 아니 이제는 설내일마저 진지해지고 나니 난데없이 퍼포먼스 오케스트라를 선보이고 있다. 원작에서의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열정과 노력이 배제된 채, 더구나 보다 즐겁게 음악을 하고 싶은 순수한 욕구가 그저 튀고 싶은 철부지들의 섣부른 장난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서히 고조되는 과정 없이 보여지는 결과란 그만큼 갑작스럽고 어색하다. 당황스럽다. 하기는 S오케스트라라고 해도 캐릭터가 부여된 것은 유일락(고경표 분)과 설내일, 최민희(도희 분),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이윤후 정도다. 더 보여줄 관계도 이야기도 없이 그것이 전부다. 차라리 한국드라마의 현실에 맞게 관계를 위주로 리메이크하려 했으면 그나마 치밀하기라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냥 되는대로 대충 맞춰 쌓아 올린 부실공사를 보는 느낌이다. 빈 구멍으로 바람이 휭휭 지나간다.
코미디의 오버스런 재미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음악을 향한 꿈과 열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특별히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흥미롭거나 매력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대학재단과 교수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역시 치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체가 없다. 과연 무엇으로 이 드라마를 정의내려야 할까? 무엇을 기대하고 이 드라마를 기다려 봐야 하는 것일까? 배우들 자신은 매력적이다. 그나마 한 가지 장점일 것이다.
방향을 잃은지 벌써 오래 되었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그리고 드라마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마저 잃어버렸다. 중심을 잃고 있는대로 흔들리고 있다. 가장 쉬운 길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면서 지나온 길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한다. 처음 의도한 대로 일단 끝을 보던가. 아니면 아예 뒤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가. 그러려면 작가와 제작진 자신이 중심을 바로잡아야 한다. 연기자는 단지 연기를 할 뿐이다. 무엇을 연기해야 하는가. 정신없다. 그냥 보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