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만과 편견 - 사람이, 사람을 위해, 사람을 수사하다

까칠부 2014. 11. 5. 04:03

범죄 역시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이 죄를 짓고 사람이 그 피해자가 된다. 어떻게 누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어떻게 누가 왜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가? 범죄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어떤 정교한 추리나 치밀한 장치에 의해 사건을 풀어가는 드라마가 아니다.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수사하는 도구가 아닌 검사라는 인간이다.


인물들 개인의 사연과 사건이 절묘하게 맞물린다. 한열무(백진희 분)는 오래전 동생을 잃었다. 이번 사건에서는 거꾸로 동생쪽이 살아남았지만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큰 차이는 없다. 죽은 누나 윤지도 동생 찬이를 남겨두고 먼저 먼 길을 떠났다. 살아있는 누나 한열무 역시 죽은 동생 한결이를 남겨두고 지금껏 살아왔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일 게다. 가엾고 또 가엾기에 동생이 항상 남겨지게 된다. 윤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찬이를 불러온 조사실에서 한열무는 찬이의 누나가 되어 있었다. 누나로서 동생 한결이에게 못 다한 일들을 찬이를 위해 해주고 싶다. 처음은 윤지의 죽음에서 한결이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어린이집 원장이 윤지를 죽인 이유 역시 결국은 인간의 나약함일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돌려받고 싶다. 돌려받기를 기대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온전히 주기만 하는 사랑이란 설사 낳아준 친부모라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기대하기에 실망하고, 집착하기에 원망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아이가 자기를 조금만 돌아봐 주었으면. 조금만이라도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으면. 처음에는 어쩌면 순수한 선의였겠지만 어느새 뒤틀리고 일그러진 악의가 되어 끝나고 말았다. 마지막 어린이집 원장이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밉거나 원망스럽다기보다 차라리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약하고 애처로운가.


어째서 부장 문희만(최민수 분)은 어떻게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려 집착하고 있었는가. 어쩌면 경찰 내부의 부조리일 것이다. 사건의 유력한 피의자 주변에 검찰의 상층부와 통하는 사람이 있다. 문희만은 어떻게든 예산을 확보해서 큰 실적이 될 수 있는 마약사건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고 싶어한다. 법무부 검찰국장이라면 문희만의 바람을 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약사범과 유죄여부도 불분명한 어린이집 어린이 사망사건, 무게추는 확실히 기운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마약사건을 이렇게도 활용한다. 수습에 불과한 한열무가 부장의 지시까지 거스르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문희만이 한열무를 가차없이 다그치는 이유가 그렇게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보다 큰 사건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고 싶은 검사로서의 욕심이 그보다 작은 사건을 거래의 수단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문희만 역시 검찰이었다. 베테랑으로서의 경험과 직관이 결정문을 넘기고 난 직후 잠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사건의 의문점들이 한눈에 들어오게끔 만든다. 외면하지 않는다. 사건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래봐야 입증하기도 어려운 고의성 없는 과실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업무가 아닌 댓가없이 온정만으로 아이를 맡아서 보살펴 온 경우이기에 업무상 과실치사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단순한 과실이 아니었다면. 그러나 아직 확실하지 않은 단계에서 직접 사건에 발을 담그는 것은 위험하다. 어린이집 원장의 혐의가 보다 구체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검찰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과 관계를 정리할 것을 건의한다. 이미 혐의사실이 드러난 피의자를 단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봐줄 검찰은 없다. 오히려 검찰 내부의 부조리한 모습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기관으로서의 검찰의 엄정함과 순결함을 강조해 보여준다. 그냥 검사도 인간일 뿐이다.


문희만과 한열무의 대립은 한열무를 보호하려는 구동치(최진혁 분)와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서로 엇갈린 한열무와 구동치의 관계를 더욱 집요하게 비트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히려 구동치를 인정하기에 더 구동치를 인정할 수 없다. 구동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에 더 구동치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한결이 죽은 장소에 구동치의 대학수능성적표가 놓여 있었다. 찢겨진 성적표 뒤에는 살려달라는 한결의 절박한 호소가 적혀 있었다. 한열무와 구동치의 관계가 진전되려는순간 그 사실이 밝혀지고 만다. 한열무와 구동치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한열무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딜레마 역시 커지게 된다. 구동치에 대한 미련과 커져가는 호감이 더욱 자신과 구동치를 몰아붙이게 될 것이다. 절묘하다. 마치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서 곡예하듯 사랑과 원망이 변증을 이루며 혼란과 갈등을 중첩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이만한 로맨스 드라마가 어디에 있을까?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자식을 먼저 보낸 어느 부모의 가슴에 자식을 묻을 자리가 남아 있을까? 자식을 묻고 제대로 덮을 수나 있을까? 아직 보내지 못한 자식이 살아서 온통 부모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한열무의 어머니 김명숙(김나운 분)의 기행이 그래서 이해가 된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머리로는 자식을 떠나보냈는데 마음은 여전히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치는 것이 정상이다. 하기는 한열무 자신도 지금 정상은 아닐 것이다. 아니 가족을 먼저 보낸 남은 가족으로서 한열무 역시 정상이다. 묻지 못한다. 결코 쉽게 묻지 못한다.


누나가 죽은 줄도 모르고 누나에게 주려고 바나나를 먹지 않고 가방에 넣어둔다. 언젠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그 말을 믿고 원장을 위해 거짓말을 해준다. 원장으로 인해 누나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증언으로 인해 원장이 무죄가 되려 하고 있다. 잔인한 아이러지가 마음을 옭죈다. 어른이 아이를 죽인다. 어른의 탐욕과 무지가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만일 찬이가 자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윤지가 죽임을 당한 이유나 과정보다 더 아프게 가슴에 새겨진다. 한열무가 찬이를 안는다. 그 순간 한열무는 어른이 아닌 찬이의 누나다. 무엇을 위해 진실은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진실은 밝혀야 하는가. '오만과 편견'이라는 드라마가 가지는 가치다. 대단한 추리도 정교한 장치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위해 수사를 하고 진실을 밝힌다. 진실이 의미를 갖는다.


과연 구동치는 한열무의 말처럼 한열무의 동생 한결을 살해했는가? 공중파 드라마라는 점에서 사실 그다지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래서 긴장도 되지 않는다. 너무 아는 것도 그래서 때로 병이다. 구동치가 한결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누가 한결을 살해한 진짜 범인일까? 구동치는 어쩌면 알고 있을지 모른다. 갈 길이 멀다. 사랑도. 진실도. 더욱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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