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 더 뜨겁고 끈끈하고 격렬한, 대미를 마치다!
뒤의 25분은 어쩌면 사족에 가까웠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드라마에 맞춰졌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데 상관없는 이야기가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하고 어떻게 살았는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흥부가 부자가 된 것이 중요하지 부자가 되어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리 필요없는 이야기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흩어지고 만다.
어쩌면 드라마의 장그래(임시완 분)은 원작의 장그래에 비해 운이 좋은 경우일 것이다. 원작의 장그래는 회사에 남고 싶었음에도 끝내 남지 못했다. 그러나 드라마의 장그래는 회사가 결정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마음이 떠나 있던 상태였다. 그나마 오상식(이성민 분) 차장이 떠나면서 남긴 '버티라!'는 한 마디가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하게 붙잡아두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종료'란 그를 회사에 얽매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모두가 자신의 정규직전환을 위해 바쁘게 뛰는 가운데 오로지 장그래만이 남의 일인 것처럼 한가롭기만 하다.
자기의 잘못으로 오상식 차장마저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최전무(이경영 분) 역시 장그래 자신이 계약직으로나마 원인터네셔널이라는 대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던 은인이었다. 계약직이란 어쩌면 그같은 자신의 마음의 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을 것이다. 언젠가 떠나야 할 회사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떠나야만 하는 자신이다. 굳이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오상식 차장과 장그래, 거기다 김동식(김대명 분) 대리까지 떠나고 혼자 남은 회사가 삭막하고 쓸쓸해도 천관웅(박해준 분) 과장은 감히 그들을 쫓아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할 것이다. 직장이란 많은 직장인들에게 이미 자신의 삶의 일부다. 오상식 차장 역시 주위에서 일부러 떠밀지만 않았다면 굳이 자신이 먼저 사표를 쓸 생각따위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껏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일 것이다. 현재와 이어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의 미래와 갑작스럽게 단절되는 상실감이며 좌절이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드라마의 장그래는 담담하다. 이미 마음도 떠났고, 자신의 현재도 미래도 지금의 회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원작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너무나 어렵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같은 현실들이 드라마에서는 너무 쉽게 지나가고 만다. 장그래를 아끼는 주변의 노력만이 안타까울 뿐 정작 장그래가 떠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계약이 끝나고 그는 회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성대리(태인호 분)의 분류는 드라마를 3류 치정극으로 전락시키는 원작에도 없는 최악의 에피소드였다. 아무리 공공의 적이 되었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응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한석률(변요한 분)이 성대리보다 일도 더 잘하고 실력도 있더라는 정도가 적당했을 것이다. 그동안 보아온 성대리의 오만함이나 성급함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을 한석률이 해결하면서 둘의 입장이 역전된다. 일로 시작했으면 일로 끝낸다. 회사에서의 일로 사생활까지 들추는 건 반칙일 것이다. 한석률은 정작 성대리의 사진들을 불태웠는데 드라마는 그 사진을 끄집어내어 남편까지 불러왔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불륜의 대상을 위해 근무하는 회사에 특혜를 베푼다. 갑자기 다른 드라마가 된 듯 어색했다.
허무할 정도로 마지막회는 그냥 마지막회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남는 탓에 감정까지 남아 버렸다. 그렇게 끝내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계약기간이 끝나 회사를 떠났어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오상식 차장이 손을 내밀어주어 다시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다. 너무 구체적이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진다. 그런 때는 조금 여운을 남겨두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각자 자기가 마음에 그리는 이후의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장그래가 있었을 것이다.
건조할 정도로 담백했던 원작에 비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겁고 끈적거렸고 자극적이었다. 원작의 차분한 리얼리티는 한결 온기와 습기가 느껴지는 판타지를 더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쪽이 더 사실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안영이(강소라 분)와 장백기(강하늘 분)는 드라마를 통해 더 살아났다. 장그래는 숨쉬고 있었다. 오차장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운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