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류성룡과 이순신 천거, 드라마와 역사의 차이
차라리 지난날 선조(김태우 분)가 개인적으로 류성룡(김상중 분)에게 무재로써 쓸만한 이를 물었을 때 '이순신'을 천거했던 기억을 삽입했으면 어땠을까?
선조가 이순신을 모르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도 언급된 선조 20년,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4년 전인 1587년 조산만호 시절 여진족의 침입으로 녹둔도에서 10여 명의 병사와 106명의 백성들을 잃었을 때 경흥부사이던 이경록과 더불어 백의종군케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당사자가 바로 선조였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에 대해 감정이 안좋았던 이일의 장계도 있었고 해서 비변사에서는 더 큰 벌을 내리려 했지만 선조는 오히려 이순신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이때 백의종군하여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움으로써 이순신은 죄를 씻고 다시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과연 선조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은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
더구나 드라마에서 묘사된 비변사의 대신들이 선조의 명에 따라 재능있는 무장을 천거하는 장면이 선조실록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산해 역시 이순신을 몰라서는 안되었다. 오히려 드라마의 시간보다 2년 앞선 1589년 1월 선조가 불차채용하겠다며 무장을 천거해 올리라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을 천거한 대신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산해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이산해, 다른 한 사람이 정언신, 드라마에서도 나왔다시피 정언신은 형 정언지와 더불어 정여립의 모반과 연루되어 유배되고 있었다. 참고로 드라마에서 언급된 권율과 송상현은 모두 문신으로 무장이 아니었다. 이때 천거된 무장 가운데 이후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로 정발, 신할, 박진 등이 있었다. 차라리 이들의 이름이 거론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해 7월 비변사에서 선조의 명에 따라 무장들을 천거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정작 보고에는 없던 이경록과 이순신의 이름을 추가하여 채용할 뜻을 밝힌 것도 바로 선조였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591년, 즉 드라마의 시간에서 이후 전라우수사가 되는 이억기와 더불어 이순신을 남쪽의 요해로 보내 공을 세우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선조 자신이었고, 바로 그 다음날 종 5품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종 4품 진도군수로, 다시 부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3품 가리포첨사를 거쳐 종 2품 전라좌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도 선조 자신이었다. 이 자라에서 윤두수(임동진 분)의 호조판서 임명도 이루어진다. 간관들의 거센 반대에도 최소한의 형식만을 갖추어 하룻만에 6품계를 뛰어넘는 파격을 끝까지 밀어붙여 관철시킨 것도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최소한 이 단계에서 류성룡의 역할은 정식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반대하는 신하들과 싸우는 것도 선조의 몫이었던 셈이다.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자신이 천거했노라 류성룡이 기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료의 기록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전혀 없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류성룡에게 모든 공을 돌리다 보니 기록과도 맞지 않고 갑자기 신파로 빠지기 시작한다.
참고로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것도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임명될 당시를 말하는 것이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던 당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었다. 더구나 이미 이순신을 벌 줄 것을 결심한 선조 앞에서 이순신을 변호하기보다 이순신의 교만함을 꾸짖으며 그에 동조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선조를 막아서며 이순신을 구명하려 한 것은 당시 도체찰사이던 이원익이었다. 아마도 자신도 인정했듯 이순신을 조산만호로 천거했었던 전력이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컸었던 때문이었다 여겨진다. 어차피 이원익 역시 류성룡과 같은 남인이었다. 이덕형(남성진 분)은 원래 이순신을 오해했었다 장계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었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이순신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것이 어울려 보인다. 이순신이 이덕형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죽을 정도로' 고문당하던 당시에도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었다.
건저의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정승의 반열에 있으면서 종사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책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이 분노했다는 것은 전제왕조에서 무엇보다 큰 죄일 수밖에 없었다. 빌미가 되었다. 왕이 정철에게서 마음을 거둔 순간 그 틈을 비집고 정철을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왕은 단지 선비들의 왕과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여 그 가부만을 결정하면 된다. 왕의 책임과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일이다. 그래서 류성룡 역시 건저의 당시 정철을 돕는 말을 하지 않았었고, 이순신을 벌주려 했을 때도 그를 탓하며 선조를 돕고 있었다. 선조의 분노에도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강행하고, 반대당파인 류성룡을 정승의 반열에 있음에도 임의로 사찰하는 장면들은 선조가 정철을 쳐내야 할 당위를 강화해준다. 권력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권력을 믿은 나머지 자칫 선을 넘기가 쉽다. 역린은 그것을 말한다. 용(=왕)을 분노케 만드는 약점이다.
어차피 1591년 통신사가 돌아올 당시 일본의 침략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조선과의 무역에 목숨을 걸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끊임없이 조선조정에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다만 그 규모와 시기가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을 조선보다 작은 나라라 여기고 있었다. 일본인 가운데도 많은 이들이 조선을 일본보다 큰 나라라 여기고 있었다. 과연 그런 일본에게 더구나 바다를 건너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킬 능력이 있는가. 오판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조정의 지시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게 된다. 민심의 동요와 이반을 우려했기에 전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성일의 변명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한 뒤로도 여전히 조선은 만일 있을지 모를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아직 조선조정이 전쟁준비에 한창이던 1592년 일본군은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어설프고 산만하기만 한 카메라워크가 눈에 거슬린다. 왜 그 장면에서 쓸데없이 인물들을 줌업하는 것일까? 굳이 필요치 않은 기교였다. 차라리 카메라를 고정하여 인물의 표정이나 대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20세기에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다. 그다지 놀랄 일도, 집중해야 할 일도 없다. 오히려 인물을 오가며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 장면이었다. 조명과 화질 역시 놀라울 정도로 20세기의 드라마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의도한 것이었을까? 드라마 자체가 20세기에 대한 오마주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옳고, 바르고, 어긋남 없고, 그러니 류성룡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순신을 천거하는 것조차 윤두수에게로 비중이 넘어간다. 이순신의 천거와 관련하여 류성룡을 조사하고, 마침내 이일로부터 이순신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이 다시 건저의와 이어진 선조의 결단을 재촉한다. 존재감이 없다. 정치를 혐오한다. 정파를 부정한다. 그러니 정치에서 하는 일이란 없다.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명재상일까? 재미도 없다.
고증은 이제 어느 정도 무시하고 본다. 그런 점에서 건저의와 이순신의 천거를 연결하는 방식이 매우 세련되다. 건저의를 통해 정철을 비롯한 서인이 제거되어야 하는 당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순간 역설처럼 모두가 아는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가 이어진다. 드라마로서 흥미롭다. 다만 실제의 역사가 더 흥미롭다. 오늘도 아쉬움을 조금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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