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도망치는 백성들, 국가와 국민의 이유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근대이전의 국가라 하는 것이었다. 국가란 왕실이었다. 지배신분이었다. 백성이란 단지 바로 그 국가를 위해 세금과 부역을 바치는 존재에 불과했었다. 과연 근대 이전 국민을 위한 국가라는 것이 존재했던가.
그래서 공자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물론 근세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멀리 유럽에까지 전해지며 계몽주의가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었다.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인 구조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배자인 군주와 피지배자인 백성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 했었다. 군주는 백성을 보살피고 지키며, 백성은 그런 군주를 온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이란 대상이고 객체일 뿐이던 전근대의 한계는 그조차도 후자에 더 방점을 두고 단지 백성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백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군주에게 백성이 대상이고 객체이듯 백성들에게도 군주니 나라니 하는 것은 그저 뜬구름잡는 소리에 불과했었다. 그저 대대로 살아온 땅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자손들도 살아가야 할 땅이기에, 그 땅을 잃지 않고자 지배자의 요구에 순응해 왔을 따름이었다. 왕이 바뀐다고 쫓겨나는 왕을 위해 일어서는 백성도 없었고, 나라가 망한다고 어차피 망할 나라를 지키겠다며 목숨을 거는 백성도 없었다. 그것은 왕이며 나라로부터 무어라도 얻어먹을 것이 있는 높으신 신분들이나 신경쓰는 것이었다. 전쟁이 나더라도 해를 입지 않도록 안전한 곳으로 몸부터 피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피할 수 없다면 새로운 지배자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몸조심하는 것이 차선일 것이다. 그렇게 백성들은 핏빛으로 물든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이 땅에서 수천년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국가인가? 어째서 군주인가?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전쟁을 대비한다며 부역에, 군역에, 농사지어 먹고 사는 것마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런데도 국가인가? 그런데도 군주인가? 어제까지 이웃해 살던 이들이 무기를 겨누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군역을 피해 도망쳤던 이들의 손에 죽어간 이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살고 있는 다른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죽이게 하는가? 바로 그 이유를 들려주는 것이 지배자의 '통치기술'이었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리고, 압도적인 폭력과 공포를 보여주고, 혹은 은혜를 베풀어 마음을 사고, 드물게 논리로써 설득하여 납득시키고. 선조(김태우 분)가 보여주고 있는 패도와 류성룡(김상중 분)이 추구하는 왕도는 모두 그를 위한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의 위기에 스스로 발벗고 나서게 한다. 하지만 백성들이란 영악해서 그리 쉽게 넘어가주지 않는다
지금의 가치로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국민된 자로써 마땅히 나서서 그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하나다. 국가와 국민은 공동운명체다. 물론 이 뒤에 한 가지가 더 붙는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배자는 곧 국가와 동일하며, 따라서 지배자의 요구는 국민의 요구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근대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던 바일 것이다. 비로소 국가와 국민은 하나가 되었다. 국가로부터 받는 만큼 마땅히 자발적으로 징집되어 국가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싸워야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준비일 텐데도 오히려 그것을 원망하고 반발하여 심지어 같은 처지의 병사마저 죽이고 만다. 심지어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그 원망을 돌려 침략자인 일본군의 편에 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백성들이란. 그래서 차라리 힘으로 누르고 굴복시키려 한다. 류성룡은 과연 드라마를 통해 어떤 답을 들려주게 될 것인가.
조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장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장은 병사 개인이 알아서 각자 준비한다. 당장 수천수만의 병사들을 일일이 무장시킬만한 행정력과 재정능력을 모두 갖춘 경우가 역사상 매우 드물었었다. 병사 개인, 혹은 일정단위의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의 재량에 의해 모든 보급까지 준비되고 있었다. 어떤 부정이나 비리 같은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였다. 필요한 재정을 계산해서 예산을 세우고, 그에 맞춰 세금을 매기고, 거두어진 세금을 통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전근대의 국가들은 조선과 같이 농민을 징집하여 병사로 삼기보다 전문적인 직업군인을 고용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도 했었다. 조선 역시 후기에 이르면 농민개병을 사실상 포기하고 직업군인을 위주로 군을 구성하게 된다. 이 부분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겠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원칙적으로 양반에게도 군역과 세금이 부과되었었다. 그런데 향교와 서원에서 유학을 배우는 선비의 경우는 예외로 인정되고 있었다. 군역과 세금을 기피하려는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서원에 이름을 올리면서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서원이란 나라의 재정을 좀먹는 부정의 온상처럼 되어 버렸다.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서도 군포를 거두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보다 일찍 이루어졌어야 할 개혁이었지만 누구도 여론을 주도하는 집단인 서원의 선비들과 척을 지려 하지 않았기에 조선의 재정난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방법이 없어서 못하는 것 뿐이지 지금도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병역이며 세금이며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기에 영합하려 권리를 타협하려는 시도는 항상 그 끝이 좋지 못하다.
아무튼 조선이 가지고 있던 여러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백성을 위한답시고 세금을 낮춘 것은 좋은데, 정작 나라를 운영할 예산까지 부족해지고 말았다. 드라마에서도 묘사된 아전의 부패 역시 그런 점에서 필연적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무급직이었다. 조정에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았다. 생계는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따로 재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다면 아전은 무엇을 해서 가족을 먹여살려야 할까? 그래서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나중에는 지방관까지 함께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다. 원래는 군역을 대신해서 받는 군포이건만 조금씩 부족한 재정에 보태다 보니 나중에는 그 비중이 너무 커져 버렸다. 아예 군역을 살겠다 해도 막고 군포로 거두어 부족한 재정을 대신한다. 조선후기 군포로 인한 폐단의 이유다. 하지만 역시 그 부분을 말할 수 없다. 세금을 올리는 것은 양반은 물론 백성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일이다. 부정을 줄이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은 임진왜란 초기 일어난 여러 의병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의병의 구성원 상당수는 제승방략에 의해 집결지에 모였다가 지휘관이 도착하지 않아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관군들이었다. 전쟁초기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조선의 관군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 싸울 의지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명령을 내릴 지휘관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역시 지방군이 강해지는 것은 자칫 반란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여러차례 큰 반란을 겪었으면서도 도성에서 경군을 동원하여 일어난 두 차례 반정을 제외하고 모두 실패한 이유는 바로 조선의 경군 중심의 군제의 영향이 컸었다. 미묘한 문제였다. 전근대의 전제왕조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왕조 자신의 안위였다. 쉽지 않은 과제다.
조선의 총체적 모순이 드러나는 회차였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는데 함께 싸우기보다 당연한 군역과 부역마저 백성들은 거부하고 도망친다. 재정은 열악하고, 구조와 제도는 부실하기만 하다. 류성룡이 극복해야 할 또다른 대상이다. 다만 어느 정도 시대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여러 문제점들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므로 소홀하게 넘어가고 있다. 오해할 수 있다. 단지 전근대사회가 가질 수 있는 여러 한계 가운데 있었다.
건저를 다시 건의하려는 정철(선동혁 분)과 윤두수(임동진 분)의 계획에 쾌재를 부르는 이산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결과를 예상하고 좋아하면서도 차마 내색하지 않는다. 정치가의 모습이다. 이재용은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일 것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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