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 한정호 대폭발! 실패의 이유

까칠부 2015. 3. 11. 06:10

'예의'란 한 마디로 때와 장소에 걸맞는 말과 행동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있는가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구분하여 지키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자신보다 주위의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정호(유준상 분)를 의전의 달인이라 일컫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말과 행동을 본능적으로 선택할 줄 안다. 상대를 자신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상대에게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우아함과 정중함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연하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상대도 그럴 것이다. 보는 것이 있고 듣는 것이 있다면 생각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처지를 아는 것이 '주제'이고, 그 처지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분수'라 부른다. 상대가 예의를 다한다면 따라서 그에 대한 보상도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한정호와 그 가족의 일상이 서봄(고아성 분)에게 아직 낯설듯, 한정호에게도 서봄 가족의 방식은 너무 생소하다. 의전의 달인 한정호의 계산이 틀어지고 마는 이유다.

 

어차피 그같은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많은 훈련이 필요한 방식따위 일상이 고단하고 버거운 이들에게는 사치나 다름없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듯,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방식이 있다. 서로 가진 것도, 지켜야 할 것도 그다지 없을 것이기에 마지막 가장 소중한 한 가지만을 지키고 지켜주려 한다. 단순하지만 이들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더구나 과연 가족의 일에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제안이란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은 개인적인 만남을 위한 자리다. 한정호가 예상치 못한 부분이다.

 

차라리 염치고 자존심이고 없이 그저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이들이었다면 이리 일이 꼬이지는 않았을 것을. 서로의 방식이 달랐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른 만큼 서로가 추구하는 예의도 달랐다. 한정호가 자랑하는 '의전'은 오히려 서형식에게는 결례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문제없이 통했건만. 전직 총리조차 적당한 형식과 댓가를 갖추어 제시했을 때 그의 의도를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서형식은 자신의 선의에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난처한 상황에 몰린 탓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상황들이 그를 궁지로 내몰고 말았다. 그런데 옆에서 아들 한인상(이준 분)이 거기다 불을 지핀다. 따지고 보면 한인상이야 말로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였다. 이 모든 것이 아들이 저지른 말도 안되는 일들을 어떻게든 좋게 수습해 보고자 그러는 것인데 그 아들놈이 그것을 바로 앞에서 비난하고 있다. 껍질이 부서진다. 지금껏 꼭꼭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진심이 그렇게 폭발하고 만다.

 

인상적이었다. 전혀 믿지 않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신뢰하는 척, 뻔히 예상한 내용임에도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여겼건만 국면전환을 위해 지영라(백지영 분) 남편의 회사인 대상그룹의 비자금문제를 터뜨리겠다는데 무심하기만 하다. 어차피 필요한 일이고, 막을 수 없는 일이니, 그저 미리 병원에 입원하도록 조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모든 행동들이 서봄의 친정인 서형식 부부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굳이 서형식 부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이야 말로 대부분의 시청자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한인상은 본능적으로 눈치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길러졌다. 서봄만 모른다. 한정호의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도 거의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더 강하게 한정호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형식이나 서봄이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한인상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인상과 서봄을 이어주는 것은... 역시 사랑일까? 한인상과 한정호가 나란히 모두가 잠든 밤에 아이가 있는 방으로 숨어든다. 인간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일 것이다.

 

한정호가 나쁜 것이 아니다. 나름의 배려였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불편해지지 않도록. 명확히 선을 그어두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기운 양가의 관계는 서로에게 폐로 작용하기 쉬울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는 며느리로 맞아들인 서봄이나 아이에게도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만 그 방식이 문제였다.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더라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그들의 한계였을 것이다. 아직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시간도 노력도 성의도 부족했다. 세상일이 그렇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렇게 터져주어야 한다. 조금은 뜬금없지만 그렇게 한정호와 최연희(유호정 분)가 망가져 줌으로써 조금은 억눌리고 비틀린 대중의 열등감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항상 잘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 좋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고. 마지막 장면에서 크게 웃고 말았다. 원래 이 드라마는 코미디 드라마였다. 잘잘한 웃음과 함께 크게 한 방을 터뜨려주고 만다. 그 상황에서는 역시 한정호라도 폭발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진짜 밉상이었다. 한인상은.

 

필요가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격식을 만든다. 진심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서봄이 한인상과 아이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늘 것을 최연희는 불편해한다. 어울리는 것. 걸맞는 것. 그래서 어두운 것일 게다. 그 넓은 집이 답답하게 좁아 보이는 것일 터다. 갈수록 재미있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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