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않은 여자들 - 착할 수 없는 그녀들
역시 생각했던대로 약하다. 전혀 강하지 못하다. 그저 살짝 찔러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조차 너무 아프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사실도 나중에야 눈치챈다. 아들 이두진(김지석 분)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당시 체육선생이던 한충길(최정우 분)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 나말년(서이숙 분)은 울고 있었다. 자신의 결정이었다.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상형이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울고 있었다. 울면서도 끝내 매몰차게 한충길을 끊어내려 했었다. 새삼 한참의 세월의 흘러 한충길의 모습을 쫓는 그녀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더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여며야 했던 것일 게다. 가시까지 날카롭게 세워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것일 게다. 게의 단단한 껍질 속에는 녹아내릴 듯한 여린 살들이 감춰져 있다. 너무 여려서. 너무 쉽게 상처입어서. 그 상처를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기에.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여린 속살을 탐내어 물어뜯으려 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누군지도 모르는 포식자에게 먹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이두진에게도 그것이 보인다. 죽은 남편이 쓴 기사 가운데 굳이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는 기사를 선택하여 책에 실으려는 의도를 자신이 가진 돈을 탐내서라 무의식중에 털어놓고 만다. 누군가 자신을 적대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빼앗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친절하다면 자신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것들을 내 줄 수도, 내주어서도 안된다. 그동안 친아들처럼 여겨온 이두진조차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순간 새끼를 지키려는 암사자처럼 사나운 독기를 드러내고 만다. 더 이상 다가온다면 물어뜯어 버리겠다. 용기라기보다는 아직 너무나 약한 새끼에 대한 걱정이고 불안이다. 두려움이다.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지키고자 하는 그것은? 많은 것들을 희생해가며 지금도 필사적으로 지키려 애쓰고 있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궁지로 내몰고 있는가? 아직까지 드라마사에서 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된 것은 없었다. 다만 동생을 통해 이것저것 친정에 챙겨주고 있는 모습이 잠깐 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시놉시스는 반칙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착해질 수 없었던 것은 누구보다 착해지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착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누구보다 독하게. 누구보다 지독하게. 어째서 그녀는 착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이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어렸을 적 김현숙은 방치되어 있었다. 가장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할 때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그녀는 어머니의 관심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었다. 모든 일들은 그 사이에 일어났다. 누구의 조언도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저 혼자서만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었다. 이제와서 당시의 자신을 감싸주었던 단 하나의 기사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같은 그녀의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언니 김현정(도지원 분)은 엄마 강순옥(김혜자 분)에게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여자는 장모란(장미희 분) 뿐이었다 확신하듯 말한다. 동생으로부터 원망을 들을 정도로 지독했던 그녀의 지난 시간들은 어쩌면 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독하게 자신을 다그치며 다잡아야만 했었다. 그런 자신을 뒤늦게 후회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강순옥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남편 김철희(이순재 분)를 사랑한다. 그저 장모란의 꿈에 나타난 이미 죽은 영혼마저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누웠다 하니 절로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남편이 아내인 자신과 딸들마저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떠났다. 장모란에게는 제멋대로 반지를 건네고 열차에서 뛰어내린 김철희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가 낙인처럼 새겨져 있다. 아버지는 단지 어머니만을 찾았다. 어머니도 자신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부정한 대상이었다. 그 열등감과 상실감이 마치 언니처럼 엄마처럼 강순옥을 따르게 만든다. 남편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장모란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엄마 김현숙의 강요에서 벗어나 정마리(이하나 분)는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한다. 김현숙의 열등감이 그녀의 상처다.
그래서 김철희는 아직도 기억을 잃은 채인 것일 게다.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강순옥이나 장모란등과 만나지 못하고 있을 것일 터다. 그야말로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며 끝일 테니까. 김철희의 무의식이 장모란을 기억한다. 다른 기억은 모두 아직이어도 그녀를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김철희와 만나야 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이 돌아와야 한다. 시간이 다시 흐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지나간 비틀린 시간들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강순옥도, 장모란도,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붙잡고 짓누르던 현실이었지 않을까.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악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은 약한 것이다. 김현정의 매몰차고 냉정한 이기적인 모습도, 딸을 소유하려 하는 엄마 김현숙의 집착도, 장모란을 향한 강순옥의 귀여운 심술 역시도, 그리고 어쩌면 나말년과 박은실(이미도 분)까지도. 그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이고 떠밀려 어느새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원인도 알았으니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때로 그 행복이라는 것도 누군가는 잊고 살아간다.
굳이 번거롭게 돌아가거나 하지 않는다. 아니더라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은 탓이다. 정마리는 이루오(송재림 분)과 노골적으로 이어지고, 김현정의 입가에도 이문학(손창민 분)을 의식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다만 김현숙과 정구민(박혁권 분)의 사이는 아직이다. 김현숙이 조금 더 자신을 찾아야 한다. 강순옥, 장모란과 김철희의 만남이 미뤄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언젠가 나말년과 한충길도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렇게 억지로 버티며 삶을 견뎌내야 했었다. 놓아두고 온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다시 되찾고 싶은 간절함이다.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 '찾해질 수 없었'던 이유들에 대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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