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않은 여자들 - 기억을 잃은 남편과의 새로운 시작
사랑했다. 그만큼 원망도 컸다. 어째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지금 자신의 곁에 없는가.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할 때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원망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이 다시 살아서 자신의 앞에 서 있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물밀듯 북받쳐 터져나오고 만다.
하기는 마음껏 원망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좋을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당신은 나의 모든 미움과 원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고, 상대에게는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 미안해해야 한다. 거칠게 소금을 집어 뿌리는 순간 이미 강순옥(김혜자 분)은 김철희(이순재 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강순옥만이 김철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웃는 듯 우는 듯, 아니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는다. 그동안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며 도저히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의 두께와 무게가 과연 얼마이겠는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강순옥은 아직도 남편 김철희를 사랑한다는 것일 게다. 김철희가 터무니없이 장모란(장미희 분)를 자기 아내라 기억하자 강순옥은 주저없이 분노의 일격을 날리고 만다. 분노와 사랑은 하나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이라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꽃을 산다. 그 해맑음이여.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을까? 그날 기차안에서 몸싸움이 있었다. 젊었을 적의 장모란과 김철희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장모란이 평생 간직하고 살아온 죄책감의 정체가 드러난다. 김철희의 기억이 불안하다. 기억을 잃었는데 당시의 일에 대해 자칫 잘못기억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강순옥이 김철희와 무언가 진전시키려 하면 그때마다 장모란이 어깃장을 놓는다. 김철희에게 자신들이 먼저 가족임을 밝히려 했을 때도, 김철희와의 좋았던 지난날을 떠올릴 때도. 강순옥이 김철희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집으로 돌아오는 장모란의 모습에서 가슴을 조이는 듯한 긴장감마저 느낀다. 도대체 장모란마저 김철희와 마주치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김철희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가족의 정을 느꼈다. 김현숙(채시라 분)과는 나이를 뛰어넘은 친구의 우정과도 같은 것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악의는 없다. 그래서 악역이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있어도 부부사이에 제 3의 이성이란 곧 모든 것을 비틀고 흐트리는 악역 그 자체일 것이다. 이기심이다. 결국 강순옥에게 전하려 했던 편지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다. 미움받기 싫어서. 더 이상 강순옥과 그녀의 가족들로부터 원망받기 싫었다. 욕심이 생겼다. 가족처럼. 친구처럼. 그래서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 의도하지 않은 훼방이다. 강순옥과 김철희의 관계는 갈수록 어려워만진다.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 그때의 자신처럼.
김현숙과 나현애(서이숙 분)가 다시 마주친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한다. 다만 김현숙의 그것은 분노이고, 나현애의 그것은 말 그대로 증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원래부터 김현숙이 바란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것 뿐이었다. 굳이 자신들의 과거와 상관없는 엄마 강순옥의 요리교실과 그것을 연관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나현애가 손을 다쳤으니 그 손을 치료한다. 그러나 그조차 나현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역시 김현숙의 주위에는 나현애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현애의 주위에는 자기가 낳은 아들조차 온전히 자신을 돌아보고 있지 않다. 어렵게 끼어든 강순옥의 요리교실에서도 그녀의 결혼을 가지고 험담하는 여자들이 있다.
어쩌면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던 자신의 친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한 홀아비에게 재취로, 그것도 시댁에서 모두 반대한 결혼을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결혼으로 일약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나현애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겨우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갖춘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지만, 그러나 애써 올라온 새로운 신분에서도 그녀를 향한 차별과 멸시는 여전했다. 장모란에게 다가가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상류사회에 인맥을 넓히고자 굳이 강순옥의 요리교실을 듣는다. 과거 나현애가 받은 촌지들은 동생의 학비로 쓰였었다. 이제는 장모란도 마냥 나현애를 미워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단서가 되어줄까? 정작 김현숙의 딸인 정마리(이하나 분)와 나현애의 아들인 이루오(송재림 분)은 심각한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굳이 어렵게 비틀고 꼬지 않는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장애들이 존재한다. 이루오의 형 이도진(김지석 분)이 정마리를 좋아한다. 이루오의 어머니 나현애와 정마리의 어머니 김현숙 사이에는 뿌리깊은 악연이 존재한다. 이루오에게 이문학(손창민 분) 막내할아버지인데 정마리에게 김현정(도지원 분)은 큰이모다. 사랑만 해도 어려운 일 투성이인데 사랑만 가지고도 오해하고 다투고 돌아선다. 주말드라마가 아니다. 이루오든 이도진이든 정마리든, 그리고 이문학과 김현정 역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결코 쉽지 않은 관계다.
기억을 잃고 나니 더 잔인하다. 아니 냉정해진다. 아내 강순옥과의 관계를,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자신을, 어쩌면 장모란에 대한 감정까지 철저히 제 3자의 입장이 되어 판단하고 결론내릴 수 있다. 김철희는 강순옥을 사랑하지 않았다. 김철희에게 강순옥은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서로는 사랑하는 딸들의 아빠이고 엄마였다. 그 관계를 잊는다. 남의 이야기처럼. 아니 남의 이야기다. 오로지 가족을 사랑하고 조강지처만을 아는 남자였다. 그러면 김철희가 아닌 안미남에게 가족과 조강지처란 누구였을까? 철저히 타인이 되어 자신의 기억을 듣는 무심함에 소름마저 돋는다.
그저 엄마 강순옥의 표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몇 배나 된다. 매 순간 스치는 수많은 감정들이 밀리미터 단위로 주름진 얼굴에 새겨진다.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살아있음을 알게 된 것을 오히려 원망할 정도로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을 마음대로 각색하려는 귀여운 악의까지도. 가장 현실적인 감정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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