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전지전능의 함정에 빠진 류성룡과 드라마
어째서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종교의 경전인데 정작 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가. 신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악과 싸워 무찌르고 곤란한 처지에 놓인 선인들을 구한다. 전지하기 때문이다. 전능하기 때문이다. 신이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굳이 신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자체가 신의 절대적인 완전함을 훼손하는 행위다.
드라마란 구조다. 구조란 곧 퍼즐이다. 모자른 곳은 채우고 모난 곳은 보듬는다. 그저 하나의 개체를 메우고 깎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개체를 통해 그 의도를 확장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채울 수 있도록 구멍을 파고, 보듬을 수 있도록 남겨둔다. 그 나머지로써 구멍을 메우고, 구멍으로써 나머지를 보듬는다. 그렇게 서로가 단단히 여며졌을 때 각각의 개체는 하나의 구조로써 이어진다. 그 구조가 겹겹이 이어지고 쌓이면서 마침내 처음 의도한 구조체로써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과 인물이 모여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에 의지해 사건을 만나고, 혹은 만들고, 마침내 그것들을 해결해 나간다.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어떻게 어떤 관계를 가지며, 그것은 다시 사건과 어떻게 상호적으로 작용하는가.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남자의 성격이 어떠한가. 여자가 가진 배경이나 조건은 또한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어떤 인물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토록 흔하고 뻔한 사랑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주되며 생산될 수 있는 것일 터다. 그런데 어떤 사랑이야기에서 두 남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그야말로 완벽해서 조금의 모자른 곳도 모난 곳도 찾을 수 없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토록 자주 찾던 내외주점의 여주인을 피난지에서 우연히 만났는데도 류성룡(김상중 분)의 말이나 행동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니 내외주점의 주인 한설희(한지완 분) 역시 표정이나 몸가짐이 그저 침착하기만 할 뿐이다. 그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말 그대로 우연히 함께하고 있을 뿐 단골술집의 주인과 손님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는 자리에서 한설희의 모습을 발견하고 물색없이 표정이 바뀌던 이천리(정태우 분)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다만 과연 류성룡의 입장에서 이천리의 상대로서 한설희와 동동(한가림 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천리조차 어떤 감정적 교류 없이 철저히 사무적으로만 대하며 단지 류성룡의 명령을 수행하는 말 그대로 '수족' 이상은 아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캐릭터가 허공에 떠버린 이유다.
여지를 허락해야 한다. 흔들려야 하고 틈을 보여야 한다. 하다못해 이천리가 류성룡에게 필요불가결의 중요한 존재가 된다면 이천리를 중심으로 한설희와 동동의 삼각관계가 드라마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류성룡의 또다른 의지가 되어 전국을 누비고 여러가지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소통도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이천리는 그저 류성룡의 명령을 따르는 위치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한설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을 뿐인 타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치고 배역에 비중이 있다 보니 배려차원에서 사족만 늘어갈 뿐이다. 불필요한 장면들에 분량만 늘어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천리고 한설희고 없이, 아니 설사 있더라도 단역 수준으로 비중을 낮췄더라면 이렇게까지 산만했을까.
그러고 보면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가장 재미있었을 때는 드라마 초반 이산해(이재용 분)가 적당히 류성룡과 균형을 맞추며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던 때였을 것이다. 선조(김태우 분)도 당시는 류성룡과 서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 다르고, 서로가 보고 듣는 것도 모두 다르다. 때로는 같은 목적을 위해 손을 잡는가 하면, 때로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대립하며 충돌한다. 대등한 관계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며 류성룡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 그같은 상호적인 관계는 일방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류성룡은 옳았고 선조와 이산해는 틀렸다. 작가의 사고가 그대로 드러난다. 류성룡이 아닌 자기가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조는 한응인에게 임진강에서 공세적으로 일본군에 물리칠 것을 주문한다. 옳고 그름은 곧 이기고 지는 것이다. 류성룡은 승자다. 류성룡이 하는 말은 모두 옳다.
그래서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만다. 류성룡의 말은 모두 옳다. 류성룡의 행동도 모두 옳다. 류성룡은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일본에 철저히 밀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사이의 부조화와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전지전능의 주인공이 빠지는 딜레마일 것이다. 전지전능을 잃거나, 혹은 무력화되거나. 여전히 모든 것을 꿰뚫고 이미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전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예 듣지 않는다. 듣고도 무시한다. 더 무능해지고 이상해진다. 원래는 선조의 잘못이 아니었던 신각의 죽음이나 한응인의 패전마저도 선조의 잘못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각이 경상좌병사로서 적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싸우기도 전에 도망친 것에 대한 처벌을 받아 죽은 것을 선조의 명을 받은 한응인의 독단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묘사한다. 선조와 조정의 잘못이 커야 류성룡의 전지와 전능에 의한 모순이 가려진다.
모두가 흠이 있고 모난 곳이 있다. 그 빈 자리와 모난 곳이 서로 물고 물리며 관계를 만들고 구조를 이룬다. 혼자서만 완전하다. 홀로 완전무결하다.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겉돈다. 섞이지 못하고 방관자가 되고 만다. 그럴수록 류성룡의 모든 판단은 옳고, 그런 류성룡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은 암울하다. 신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없는 이유다. 전지전능한 신이 주인공이라면 과정이 필요없다. 그 과정이 드라마를 이루는 뼈대이고 기둥들이다. 재미가 없다. 비할 수 없이 한심해졌어도 선조가 등장하면 재미있다. 원수라 할 수 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 분)와 그 주위의 이야기가 나올 때도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류성룡만큼은 재미가 없다. 그저 존재한다. 그저 생각하고 판단한다. 인간으로 내려와야 한다. 새삼 그 주위의 인물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보낸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제작비를 이순신(김석훈 분)의 해전을 구현하는데 다 써버리고 말았다. 농담이 전혀 농담같지 않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만다. 어차피 제작비는 언제나 부족하다. 부족한 제작비를 어떻게 집중하여 최대의 효과를 노릴 것인가. 모두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구현할 필요도 없다. 단지 전선 한 척, 그러나 그 전선위에서의 전투가 바다에서의 모든 전투를 대신한다. 포탄이 터지지 않는다. 대신 목재로 된 배가 터져나가고, 사람이 터져나간다. 적을 무찌르는 통쾌함과 동시에 전장의 참혹함까지 전해준다. 다만 기왕에 궁수까지 준비한 것 적선이 불타는 장면에서 궁수들의 활약가지 보여주었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이순신의 첫 승전보는 답답한 조정을 보는 시청자에게도 큰 쾌거였을 것이다.
신은 결코 주인공일 수 없다. 전지전능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죽이는 가장 큰 제약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나마 선조는 욕먹을 짓이라도 한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류성룡만이 홀로 멈춰 있다. 재미없는 이유다. 드라마를 중심에서 끌어가기에 주인공인 것이다. 선조가 주인고이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이다. 그들만 보인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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