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항로 - 조조? 혹은 마오?
어렸을 적에는 그리 잘 읽혔었다. 바로 이해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읽으려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놈의 작가는 뭔 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인가.
옹호할 수 없는 부분까지 애써 변명해주려다 보니 글이 꼬이고 만다.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쓰기 시작했는데 정작 써나가다 보니 잘못된 결론이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끼워맞추려다 보니 글에 파탄이 생긴다. 논리적이려 할 수록 모순만 깊어진다. 글을 쓸 때 가장 괴로운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째서 작가는 이렇게까지 해가며 조조를 변호해주려 애쓰고 있는가. 만화의 도입부에 등장한 '마오쩌둥'의 모습과 만화 내내 반복되는 '유교'에 대한 증오가 그 단서를 제공해준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문화와 전통을 파괴한다. 무언가 닮아 있다. 바로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그러므로 마오쩌둥은 중국인에게 죄인이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조차도 역사발전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 '창천항로'를 읽었을 때 쉽게 이해되었던 것도 납득이 간다. 한때 '마오이즘'이라는 것이 세계 좌파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산업화되지 않은 가난한 제 3세계에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부패하고 낡은 봉건적 질서를 일소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을 일구어낸 마오쩌둥은 당시 핍박받는 이들을 위한 혁명을 꿈꾸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일생의 과오라 여겨지는 '문화대혁명'조차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유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의 봉건적 유산은 당시 내개도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과연 작가는 '유학'을,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며 작품을 쓰고 있었는가.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조조가 주인공임에도 그의 반대편에 선 인물들이 더 모순없이 이해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무리하게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억지로 옹호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관된 방향을 가지고 순리대로 풀어나가려 한다. 작위적이지만 그래서 어긋남없이 수월하게 읽히고 이해된다. 동탁이 그렇고, 원소가 그렇고, 특히 유비가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창천항로'의 실제 주인공이 유비일 것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유비야 말로 자연스럽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완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성에서의 패배마저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서주에서의 학살은 그가 그리는 큰 그림으로 뭉뚱그린다. 적벽에서 패했을 때는 회를 잘못 먹고 탈이 나서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었다. 그를 반대한 많은 사람들. 그에 저항하려 한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 그마저 어리석음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만한 인물이었는가. 만화가 스스로 말해준다. 이 부자연스러움이야 말로 그같은 이해의 모순된 부분이라고.
결국은 그만큼 머리가 자란 때문일 것이다. 몸은 일찌감치 다 자랐지만 아직까지 그 모순됨을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자라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읽었을 때 그런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훌륭한 만화지만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은 더이상 없다. 삼국지의 조조가 아니었다면 주인공에 대한 모순된 묘사로 인해 상당한 비난을 들었을 작품일 듯.
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는 그냥 건너뛰었다. 한 권의 절반 이상을 그냥 지나친 경우도 있었다. 도저히 보아주기 힘들다. 어쨌든 끝까지는 본다.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