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중립 -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이를테면 간단한 것이다. 길가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다. 뜯어말리려니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붙잡으며 말린다.
"지금은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니 시시비비가 가려질 때까지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약한 것 같으면 조금 더 센 비유를 들어보겠다.
실제 뉴스로 보도되기도 했을 것이다. 길가는데 한귀퉁이에서 웬 남자 서넛이 한 여성을 강간하고 있다. 역시 말리려 하니 주위에서 붙잡는다.
"누가 잘못한 것인지 명명백백히 밝혀지지 않은 이상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서는 안됩니다."
과거 '타진요 사태' 당시 중립을 떠들던 잘난 자칭 평론가들에 대해 혐오와 경멸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타진요와 그에 동조하는 인간들이 의해 타블로라는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실제의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중립을 말한다. 중립을 말하며 방관하는 사이 피해는 누적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중립이라 말해야 하는가.
4대강 공사가 실제 진행중인 상황에서도 뭐가 옳은지 모르겠으므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 4대강 공사는 계속 진행중이었고 결국은 더 이상 반대할 것도 없이 모든 공사가 완료되고 말았다. 그것은 과연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인가? 실제 진행중인 현실에 대한 중립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도 중립을 일컬어 이성과 객관, 냉정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옹호한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배척당하고 멸시당한다. 차별당하고 무시당한다. 현실에서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점잖은 척 말한다.
"일단은 누구의 편도 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며 결론이 내려지기를 기다리자."
어째서 차별에 대한 중립은 없는가. 어째서 억압과 폭력과 파괴에 대한 중립은 없는가. 중립을 지키는 그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이기 때문이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립을 지키는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서기가 두렵고, 그로 인해 누군가와 맞서는 것이 부담스럽다.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비겁하고 비열한 극단의 이기를 단지 이성과 객관, 냉정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감추려 할 뿐이다. 그 비루한 알몸뚱이가 그래서 더 혐오스럽다.
그냥 비겁한 것이다. 판단할 능력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 책임질 자신도 없는 것 뿐이다. 그래서 도망치고, 한 발 물러나 구경꾼이기를 자처한다. 그런 주제에 잘난 척 논객입네 평론가입네 하는 것들이 그저 가소로울 뿐. 그런 놈들을 또 추켜세우는 덜떨어진 것들이 있다. 그렇게 비겁이 일상화된다.
차라리 차별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최소한 폭력과 파괴의 편에 선 그들이라면 실체가 있으니 극복도 할 수 있다. 맞서기라도 할 수 있다. 차라리 국민을 학살하는 독재정권과는 맞설수라도 있지만,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방관하는 다수의 다른 국민들과는 맞서지조차 못한다. 지나고 누군가 우세한 듯 보이면 그때서야 승자의 편에서 함께 영광만을 누리려 한다.
물론 가끔 위험하다. 스스로 실수도 저지르고, 때로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불의한 폭력과 억압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례의 원칙이다. 실수로 인한 책임보다 그를 돕지 못한 죄책감이 항상 더 크다.
똑똑한 놈들을 싫어한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척 하는 놈들을 싫어한다. 많이 배우고 말도 잘하는 잘난 놈들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선하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
아무튼 동성간 결혼을 두고 다시 시끄럽다. 그리고 잘난 중립론자들은 또 열심히 떠들어댄다. 중립은 벼슬이다. 어떤 비판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라는 중립이다. 같잖은 것들이다.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