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선비 - 소재의 신선함, 묘사와 연출의 식상함
언제부터인가 사극이라 하면 반드시 배경으로 궁궐 정도는 나와주어야 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왕이 나오고, 왕자가 나오고, 공주가 나오고, 고귀한 신분의 아름다운 남녀가 나오고, 한 편으로 탐욕스럽고 사악한 권력자들이 반대편에서 그들과 싸우고 있다. 이번에는 단지 화려한 궁궐의 그늘에서 왕실을 농락하는 실체로써 유럽의 전설에 나오는 뱀파이어를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근대 이후 정형화된 뱀파이어의 모습 그대로다.
사람들이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창작물을 만들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이유는 결국 두 가지로 수렴될 것이다. 하나는 근대 이후 사라져가는 고귀하고 특별한 신분에 대한 평범한 대중의 동경이다. 엄숙하고 품위있는 예법과 사치스럽고 화려한 삶들에 대한 환상이다. 그래서 실제 해외에서도 시대물 가운데 상당수가 이와 같은 고귀한 혈통과 화려한 궁정을 소재와 배경으로 삼은 것들이 적지 않다. 문명화된 대부분의 현대사회에서 평범한 개인이 일상에서 결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체험들일 것이다. 등장인물에 자신을 이입함으로써 마치 직접 체험하는 듯한 만족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누구에게나 가족과 친구가 있다. 꿈이 있다. 일이 있고, 동료가 있다. 어떻게, 무엇을, 누구와, 누구를 위해. 같은 가족이라도 당장 가장 가까운 일본마저 가족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다르다. 사랑하는 방식도, 사랑하는 방향도 모두 다르다. 다른 시간이기에 가능한 것들이 있다. 지금과 다른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들도 있다. 그런 다른 시간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사실 가장 어렵다. 하나의 시간을, 세계를 완벽하게 작품 안에 구현해내야 한다. 실제의 시간처럼 완전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어쩌면 퓨전사극이 아예 사극의 전부처럼 되어 버린 현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배경은 과거인데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현재의 그것과 닮았다. 배경만 역사의 시대를 차용했을 뿐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살아가는 전반의 모습이 익숙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그것이다. 디테일을 포기한다. 가장 힘들고 가장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 그러면서 효과도 미미한 세부에 대한 묘사를 포기하고 단지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크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들로 말초적 흥미만을 자극한다. 당시를 살아가던 수많은 평범한 개인들의 변변찮은 일상보다는 왕실과 국가, 민족과 같은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이야기들이 더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잡아끈다. 왕실과 국가, 민족의 운명 앞에서 개인의 사소한 삶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강의 큰 줄거리만 있으면 나머지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는 무시될 수 있다. 괜한 수고만 든다.
배경만 조선일 뿐 굳이 조선이 배경이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조선이라고 하는 시대와 겉돌고 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실제의 역사를 차용한 것도 아닌, 단지 조선을 배경으로 삼았을 뿐인 드라마에서 엄격한 역사적 고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그 결과 인물들의 디테일이 실종되었다. 조선시대이고,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이기에 느낄 수 있는 매력과 개성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 조선의 왕같고, 조선의 왕자같고, 조선의 선비같다. 오히려 왕도, 왕자도, 선비도 없는 현대이기에 그런 인물들의 매력과 개성은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현대의 개인들이 단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수염을 달았을 뿐이었다. 단지 이름만 왕이고, 왕자이고, 선비일 뿐, 심지어 처음의 의도조차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조선이 배경일 뿐 그곳에 조선은 없다.
연출의 어색함도 눈에 띈다.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연출의 의도가 드라마의 내용을 앞선다. 가장 중요한 두 중심인물 귀(이수혁 분)와 이윤(최강창민 분)의 연기력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가장 강력한 적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주인공과 싸워야 하는, 주인공과의 대립과 대결을 통해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화면에 모습이 나오고 입에서 대사가 나올 때마다 몰입을 방해받고 만다. 주인공 김성열(이준기 분)의 처절함조차 혼자서 겉돌고 만다. 이윤은 차라리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그 모델을 찾아 적용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노골적으로 정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설정이 세부적인 묘사에 있어서의 허술함과 괴리를 더 크게 느끼게끔 만든다. 드라마의 배경도 차라리 조선이 아닌 현대였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의 다른 시대였다면 어색함이 덜했을지 모른다.
몇몇 장면은 차라리 왜 넣었는가 싶기도 하다. 조양선(이유비 분)이 김성열에게 여인임을 들키는 장면은 상당히 억지스럽기까지 했다. 필요한 장면이었을 테지만 자연스럽지도 설득력있지도 않았다. 다만 이후의 전개를 통해 납득하고 만다. 전체적으로 거칠고 만듬새가 허술하다. 이준기의 열연과 이유비의 매력이 그래서 무척 아쉽기도 하다. 소재는 신선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색다른 재미와 매력이 전부였다. 충분할 수 있지만 만족할 수 없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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