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외교와 포퓰리즘 - 이성과 감정의 혼선에 대해...

까칠부 2015. 8. 1. 01:11

대화란 의지다. 선악이 아니다. 호불호가 아니다. 필요다. 그래야만 하는 필요.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고, 그래서 말을 섞는 것조차 끔찍히 싫어도, 그러나 필요하다면 먼저 말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경찰이라면 취조를 해야 하고, 재판을 하려 해도 피의자심문을 거쳐야 한다. 아직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를 위해 협조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와의 관계가 아닌 자신의 위치에 따른 역할과 책임이 대화를 의무로써 강제한다. 단지 개인과 개인의 소통이 아닌 사회적 구조로서의 대화인 것이다.


외교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에는 감정이 없다. 인격이란 자체가 없다. 단지 필요만이 있을 뿐이다. 주권자의 필요에 따른 기능으로써 국가란 존재한다. 무엇이 구성원 다수를 위한 최선인가. 구성원 다수에게 최대의 이익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해와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어떤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하는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이른바 '리더'라 불리는 이들인 것이다. 그래서 공인이다. 공적인 존재다. 공적인 책임이 지워진다.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지운다.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도 필요가 손을 내밀고 화해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싫은 상대라도 필요하다면 같이 협상장에 설 수 있다.


북한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사회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좋아서 북한의 편에 서고 싶은 사람도 그 가운데서도 다시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북한은 현재 우리와 육상에서 국경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 유일한 대상일 것이다. 그나마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북한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영향은 바로 휴전선 넘어 우리 사회에까지 미치고 만다. 당장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사회가 소란스러워지는가. 북한의 무력도발로 잃은 귀한 목숨 또한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북한에서 무슨 일만 일어나면 당연하게 함께 언급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물론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일관성도 없고, 신의도 없다. 쉽게 말을 바꾸고, 떼를 쓰듯 자기고집만을 내세운다. 그그래서 때로 답답하고, 때로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란 당장의 결과만을 위해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이렇다 할 결과 없이도 단지 대화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북한과 대화를 한다. 북한과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다. 한국정부를 통해 북한에 메시지를 전하고 북한의 입장도 전해들을 수 있다. 북한과 관련해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도 그저 일방적인 입장표면만으로 끝나는 것과,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아도 일단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는 매우 크다. 지금은 북한과 관련해서는 우리들 자신조차 중국이나 러시아의 입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하기는 북한만일까. 미국에게 있어 일본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미국의 태평양전략은 일본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하고 유지된다. 장차 중국의 성장과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교두보로써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단지 과거사 문제로 국민적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을 이유로 일본과의 대화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같은 과거사 문제로 틀어져 있던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우리 정부는 일본에 대한 어떤 제스처를 취할 여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일본정부가 과거사 관련해서 계속해서 도발을 해와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방적인 비난과 유감표명 정도다.아무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자신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실리인 것이다. 필요에 따른 기능이다. 필요가 있으니 행위도 있다. 요즘 '징비록'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그토록 피해가 컸음에도 조선조정은 바로 토요토미를 쓰러뜨리고 들어선 도쿠가와 바쿠후와 국교를 재개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가 안정되어야 전후복구에도 전념할 수 있었다. 일본으로 납치된 백성들을 돌려받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장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더 빨리 그 조짐을 읽고 대비할 수 있다. 필요가 조선조정으로 하여금 도쿠가와 바쿠후의 국교재개에 응하도록 만든다. 청에 대한 반감으로 중기까지 명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조선조정이 청의 선진문물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결과가 19세기 서세동점의 격동기에 무지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이던 끝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 역사였다.


싫은 것은 싫은대로 둔다. 마음에 안드는 것은 마음에 안드는대로 둔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아무리 싫은 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찾아가 물건을 판다. 장사를 하는데 마음에 안든다고 손님인데 물건을 팔지 않는 경우란 드물다. 싫어도 웃는다. 마음에 안들어도 기꺼이 고개를 숙인다. 그렇다고 손님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다. 다만 싫은 티를 냄으로써 자칫 입을 수 있는 손해를 막을 수 있으면 좋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현정부와 여당을 싫어하는 이유다. 외교를 무슨 개인의 감정을 배설하는 악다구니쯤으로 여긴다. 북한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그것을 용인하는 국민의 수준이라는 것도 한심하다. 자기가 싫은 것이니 정부가 하는 것이 옳다.


포퓰리즘이라는 게 다른 게 포퓰리즘이 아니다. 집값 떨어지느 것이 걱정이다. 땅값 오르기만을 바란다. 경기가 살아야 한다. 그래서 4대강을 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편적인 정의를 앞세우기보다 개인의 질투나 시기를 일부러 조장한다. 감정에 내맡긴다. 감정에 편승한다. 그런 것을 또 개인의 감정은 잘한다 속시원하다 말해준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포퓰리즘. 단지 모두가 싫어하니 옳다. 모두가 거부하니 당연히 옳다. 무엇이 포퓰리즘인가. 무엇이 아마추어인가. 답답한 것이다. 그것이 이 사회의 수준이다.


정치란 냉정해야 한다. 자신을 지워야 한다. 개인이되 개인이 아니다. 그래서 공인이다. 좋고 싫고는 뒤로 미뤄둔다. 선악도, 정의도, 어떤 판단도 앞세우려 해서는 안된다. 이성이란 자신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이다. 모두로부터도 유리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이다. 지금도, 여기도 아닌, 보다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무엇을 추구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당장의 감정이나 이해만을 앞세운다. 그것에 또 개인들은 만족을 얻는다. 무엇이 포퓰리즘인가.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재미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