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군의 사유화와 부패의 이유...

까칠부 2015. 8. 31. 02:46

이를테면 몇 년 전 방영했던 '무신'의 초반부 내용 가운데 정작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 왔는데 정예인 사병을 아끼느라고 승병들을 징집해서 전선으로 보냈던 최충헌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몽골군이 고려의 전역을 초토화하며 약탈하고 있을 때도 정작 고려의 중앙군은 강화도에서 최씨정권을 지키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으로 유명한 삼별초 역시 최씨정권의 사병으로서 몽골군과 싸우기보다는 최씨정권을 위해 저항세력을 토벌하고, 그렇지 않아도 피폐한 백성드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에만 동원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은 무려 15만이라는 막대한 병력을 조선에 투사했지만, 정작 그 가운데 일관된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구원을 거부하고, 자신의 병력을 아끼려 중요한 전투를 회피한다. 진격명령을 내리는데 성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고, 아예 군사를 조선으로 보내는 자체를 거부하는 다이묘들마저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슬이 퍼럴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쇠약해지면서 딴생각들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병력에서도, 무기에서도, 심지어 훈련이나 실전경험에서도 한참 앞선 일본군이 임진왜란에서 크게 성과를 보지 못한 이유였다.


어째서 문민통제인가? 당연하다. 그래야 군은 오로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을 테니까. 무관이 군을 통솔한다. 나아가 군을 장악한다. 군을 사유화한다. 자신의 소유인 군을 과연 국가를 위해 내놓을 것인가. 왕이든 정부든 요구한다고 기꺼이 내놓을 것인가. 군이 손실을 입으면 바로 자신의 힘도 약해진다. 그래서 정작 무관들을 군과 분리시키려 한다. 군은 오로지 정부의 소유이며,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며, 단지 지휘관들은 그로부터 지휘의 권한만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하기는 그래도 부작용은 있다. 어차피 자기와는 상관없는 군대이니 군이야 망하든 말든 자기 잇속만 챙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제대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전근대의 한계이기도 하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군인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군이 권력자의 권력기반이 되었다. 권력자를 중심으로 사조직이 생겨난다. 그 사조직이 군을 사병화하여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킨다. 당연히 보상이 뒤따른다. 군의 비리를 군재판소에서 재판한다. 엄연한 상급자인 피의자들을 하급자인 군검찰이 수사하고 군판사들이 재판하여 판결한다. 그래봐야 자신의 상급자들과 동기다. 혹은 선후배사이다. 심지어 국방부장관은 말한다. 수억, 혹은 그 이상의 비리를 저지른 군장성에 대해 생계형이었다고.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군은 군인의 것이다. 군의 모든 것은 군인의 소유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쓰든 군이 알아서 할 몫이다.


어째서 군가 관련한 비리가 끊이지 않는가. 규모도 갈수록 커진다. 그리고 그 해악도 비례해더 더 커져만 간다. 기껏 수천억 이상을 들여 도입한 장비가 관련자의 부정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쇳덩이가 되어 버렸다. 세계최고의 성능을 다투던 군장비가 관계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어중간한 물건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아예 군이 군인들의 소유였다면, 그래서 그 군으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북한이 쳐들어와도 정작 군을 동원하려면 군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다. 사병이 사라지게 된 이유다.


비리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 처벌받아도 얻는 이익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다. 명예도 손상되지 않는다.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다. 그럴만한 자리에 있으면 한 번 쯤 그래도 좋을 것이다. 어째서 군인들이 박정희를 비롯 전두환과 같은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이들을 추앙하는가.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의 밥그릇이니까. 지금처럼 군이 군을 사유화한 채 마음껏 그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그들 군사독재자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을 가능케 한 것들도 그들 군사독재자들일 것이다. 가장 군사정권에 호의적이던 이들이 줄줄이 비리로 수사를 받고, 심지어 유죄판결까지 받는다.


하기는 그런 것을 좋아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군은 군이 소유해야 한다. 군이 군을 통제해야 한다. 군이 군을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 군이 강해진다. 군사정권의 논리였다. 이순신은 쿠데타를 일으켰어야 했다. 그만한 세력과 그만한 인망과 그만한 공적이 있다면 마땅히 권력을 가지고 조선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순신의 군은 이순신 개인의 군이 아니었다. 조정의 군이었다. 단지 조정의 명령을 받아 그를 지휘할 권한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다. 막대한 세금과 물자, 인력이 그로부터 새어나간다.


어쩌면 하나회보다도 더 지독하다. 하나회는 하나회 안에서만 하나회였다. 그러나 이제는 군 전체가 하나의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다.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로운 이들이 오히려 처벌받는다. 강직한 이들이 쫓겨나고 외면받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현실적 대안들을 선택한다. 군의 지지가 안보에 대한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는다. 적극적으로 군내 부정을 바로잡을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전전정권이라고 과연 얼마나 달랐을까. 이래도 과연 안보를 말할 수 있는가.


군만이 아니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지위도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자본을 사유화함으로써 일어나는 폐해들은 바로 현실에서 눈으로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있다. 문민통제란 감시와 견제를 통해 권력이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구조와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권력의 타락에는 무감각하다. 자본의 부패에도 무관심하다. 사유화된 권력과 자본은 심지어 법적인 책임이나 처벌로부터도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마저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납해 버린다. 군은 과연 개혁될 수 있을까. 어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