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仁과 묵가의 겸애...
흔히 仁을 어질다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정작 공자의 제자들이 생전의 가르침을 옮겨 엮은 유가의 경전 '논어'에는 仁을 어질다 해석할만한 귀절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仁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써 돌아간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그러면 과연 禮란 무엇일까? 그것은 공자가 제나라 경공에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라며 말한 '君君臣臣父父자子子' 이 여덟글자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나아가 남편은 남편다워야 하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하면, 주인은 주인다워야 하고, 손님은 손님다워야 한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그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보인다면 세상에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당시 전란이 끊이지 않던 현실에 대한 공자 나름의 분석이며 해답이었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을 알며, 그것들을 실천에 옮길 때 모든 혼란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다. 그래서 樂이다. 음악이 아름다우려면 조화로워야 한다.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도 주의깊게 듣고 그에 맞춰갈 줄 알아야 한다. 연주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도 서로간에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음악이며, 그것이 바로 조화로워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공자가 강조하던 예였던 것이다. 묻는 것이 예다. 혼자서 주장한다고 예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극기복례를 통해 仁으로 수렴된다. 즉 仁이란 어질다고 하는 개인의 성품이 아닌 그 어짊이 작용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윗사람으로써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관용과 겸애, 그래서 仁은 어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仁이 어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맹자까지도 仁을 굳이 개인의 성품으로서의 어짊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전국시대 말부터 전한 중기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묵가의 겸애와의 관계에 주목해 보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묵가의 겸애란 말 그대로 보편적인 사랑이다. 모든 인간을 구분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널리 고르게 사랑한다. 그렇다면 묵가와 경쟁하기 위해서라도 유가에도 그와 유사한 개념이 필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일까.
그것은 이후 북송대에 성리학이 성립하는 과정에서도 답습된다. 불교가 수입되어 널리 유행하면서 유가의 입지는 그만큼 위축되고 있엇다. 인간이 부처가 된다. 수해을 통해 초월자가 된다. 초월자가 되어 모든 고통과 근심을 잊고 영원한 평안과 복락을 얻는다. 성리학 이전의 유교와 성리학 이후의 유교는 전혀 별개라 할 정도로 다르다. 공자가 그토록 꺼려했던 형이상학을 통해 주희는 이전의 유교를 전혀 새롭게 해석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형이상학의 理와 현실의 氣가 공존하며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하려 한다. 理란 보다 근본적인 원리이고, 氣는 그것이 현실에 구현된 현상이며 실천이다.
어질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 엄격하고, 때로 치밀하며, 때로 냉정하고, 때로 단호하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모나지 않고, 차거나 뜨겁지 않고, 마음놓을 수 있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묵가가 유행한 이유였고, 유가가 묵가를 대신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제자백가 가운데 오로지 유가만이 남았다. 정확히 제자백가는, 아니 이후의 도교나 불교마저도 모두 유가 하나로 수렴되고 있었다. 儒란 그래서 선비의 儒다. 묵가도, 도가도, 양가도, 종횡가도, 법가도, 불교마저도 儒의 원리 아래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아마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기독교와 이슬람교 역시 그렇게 유가의 체계 아래 해석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만화 '창천항로'를 보면서 떠올렸다. 내가 아주 비상하게 만화에서 마오쩌둥의 흔적을 찾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유가를 혐오한다. 혐오를 넘어 증오한다. 하지만 유가를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당시는 아직 유가가 지배적인 이념으로 중국을 지배하던 때가 아니었다. 유가는 어떻게 천 년 넘게 중국은 물론 아시아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儒가인 이유인 것이다.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