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장사의 신 객주 - 돌아갈 곳을 잃고, 도망이 운명이 될 때

까칠부 2015. 10. 1. 05:18

스스로 돌아갈 다리를 끊어 버렸다. 어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가족이라 여겼던 이들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다. 아버지가 죽고 모두가 죄인이 되어 끌려간 가운데 혼자 남아 병들어 누운 동생까지 돌봐야 한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원망과 증오를,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기란 어지간히 세상을 산 어른들도 힘에 부치는 일이다.


휘둘리고 만다. 아마 그러고 난 다음 일따위 길소개(아역 박건태)는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그곳에서 자신은 무엇을 보게 될 지. 그래서 악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모든 잘못은 천오수에게 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마저 품어안으며 기꺼이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으려던 천오수의 모습에서 너무나 에이도록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더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한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위에 천오수와 천가객주 식구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해졌다. 죄책감을 덜려면 천오수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 천가객주 식구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천가객주를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이 바로 그 천오수와 천가객주였다. 더 이상 천오수와 천가객주를 원망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도 어려워졌다. 


아무것도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결국 그냥 떠나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소원은 어쩌면 핑계다. 그조차도 없다면 그런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다. 그마저 이루지 못한다면 지금의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초라하다. 억지로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는 자신의 오기가 굴레가 되고 족쇄가 되어 그의 삶을 옭죄게 된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더 필사적으로, 그렇게라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습을 변명하려 한다. 그나마 천소례(아역 서지희)와 천봉삼(아역 조현도)에게 아무말도 없이 떠나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은 그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다. 아예 영영 모르는 남처럼 외면하고 지내는게 나을지 모른다.


역시 혼자 남았다. 아버지가 죽고, 천가객주 식구들마저 모두 끌려갔다. 어려서부터 당연히 장래 부부가 될 것이라 믿었던 정혼자 길소개마저 말없이 자신들만 남겨두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 병까지 걸린 동생을 책임져야만 했다. 의원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 말했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동생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간호까지 해야 한다. 몸은 고단한데 희망까지 없다. 그래서 찾은 유일한 핑계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원래는 정혼자인 길소개와 함께 받들었어야 할 유언이지만 이제는 혼자서 그것을 실천하려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부탁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두고 떠나왔기에 그녀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그녀의 삶에도 헤어날 수 없는 굴레와 족쇄가 생겨났다.


그래서 천봉삼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자기가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버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을 버린 누나에게로. 자신을 떠난 형에게로. 자신이 떠나보냈던 아버지에게로. 가장 자유롭다. 한 편으로 가장 어디로 가야 할 지 확실하다. 하필 그런 천봉삼을 아버지 천오수에게 깊이 감화된 또다른 보부상 조성준(김명수 분)이 구한다. 운명처럼 장사를 무서워하고 돈을 무서워하던 천봉삼이 장사꾼의 길을 가게 된다. 그가 마침내 돌아간 곳에서 누나 천소례와 형 길소개는 어떤 모습으로 마주치게 될까. 그리고 그곳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막연히 책으로만 읽던 세도정치의 실상을 그저 지나치듯 자연스럽게 녹여내 보여준다. 개성유수와 의주부윤이 모두 안동 김문의 일가다. 안동 김문의 서출인 김학준(김학철 분)과 개성유수 김보현(김규철 분)이 사촌이고, 의주부윤 김형중은 팔촌지간이다. 본처의 자식이 아니기에 김학준이 겪어야 하는 차별과 수모, 그리고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권세를 이용하는 세도가들의 부패상,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이 아닌 뇌물과 야합에 의해 장사의 성패가 갈린다. 천오수와 같은 양심적이고 실력있는 장사꾼이 누명을 쓰고 죽고, 협잡이나 일삼는 김학준과 같은 이가 그의 천가객주를 집어삼킨다. 어쩌면 안동 김문의 김보현보다 더 대단한 것이 육의전을 휘어잡고 있는 대행수 신석주(이덕화 분)일 것이다. 그가 가진 돈의 힘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돈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돈이다. 천오수는 천가객주 식구들을 사리기 위해 무려 1만냥에 이르는 흑충(말린 해삼)을 내놓는다. 김학준은 그 천오수를 죽이기 위해 거꾸로 1만 5천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의주부윤 김형중에게 건넨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천소례가 의원을 불렀을 때는 볼 것도 없이 죽을 병이었다. 조성준이 돈을 건네고 치료를 부탁하자 천봉삼은 병도 이겨내는 강골이 된다. 같은 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 서로 다른 이유로 돈을 벌려 한다. 길소개와 천소례, 천봉삼, 그리고 김학준과 김보현, 신석주. 돈에 휘둘리고 운명을 농락당한 무수한 군상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두고 온 것들. 그들이 버려야 했던 것들. 그들이 다시 찾아야 하는 것들. 그렇기에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자 하는 서로의 운명들에 대해서. 돌아갈 곳을 잃고, 돌아갈 길을 찾는다. 때로 너무 멀리 떠나와 떠나온 사실마저 잊는다. 너무 어렸다. 너무 약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천오수의 마지막 실수다. 하기는 어린 그들만 남았다. 무심히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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