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무협의 본질, 칼을 들고 피를 묻히다

까칠부 2015. 10. 14. 05:02

무협이란 결국 칼부림이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모든 것은 서로가 맞댄 칼끝에서 결론지어진다. 시대가 다르고 공간이 달라도 그 본질만큼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어떤 배경 어떤 동기로든 결국 서로가 맞댄 칼의 모양만 바뀐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단지 장식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한다. 칼을 들고, 그 칼에 피를 묻힐 이유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를 위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손에 칼을 들도록 만들었다. 위협에 굴복했다. 두려움과 타협했다. 무엇도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좌절을 분노로 바꾸고 굴욕을 원망으로 돌린다. 다시 분노를 증오로 바꾸고 원망을 적의로 돌려 변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다만 그 순간 이방원(유아인 분)은 성공했고 이방지(변요한 분)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방원은 마음에 칼을 벼렸고 이방지는 손에 쥔 칼에 그 마음을 실었다. 두 사람이 걸어갈 서로 다른 삶의 방향이 그때부터 이미 결정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운명이 있었다. 단지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할머니를 비롯 11명이나 되는 식구가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손에 칼을 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칼을 가지기 위해 어린 동생들이 꽁꽁 숨겨두었던 것들까지 내놓아야 했다. 멧돼지를 잡기 위해 들어올린 큰 바위나 사람을 죽이는 칼이나 어쩌면 어린 무휼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맺힌 곳 없이 무겁지도 비장하지도 않다. 무휼(윤균상 분)이라는 또 하나의 칼이 어떤 다른 운명을 그려갈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강자들이 모인다. 동기는 더욱 명확해진다. 대의가 더해진다. 아직까지 삼한제일검은 권신 이인겸(최종원 분)의 측근 길태미(박혁권 분)다. 변절한 홍인방(전노민 분)의 계략으로 고향사람들은 땅을 잃었고, 어릴 적 인연은 자신을 원망하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떠나갔다. 그래서 칼을 잡았다. 칼끝을 고려에 겨누었다. 고려의 역사를 끝내려 한다. 길태미와 부딪혀야 한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이름이, 이성계(천호진 분)와 정도전(김명민 분)이라는 실재했던 역사가, 더구나 서로에게 겨눈 허구의 칼끝 위에 실제의 무게를 더한다. 풀어야 할 음모와 비밀들이 수많은 인연과 악연을 감춘 채 그들이 가는 앞에 놓인다. 마침내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순간 운명 역시 결론지어질 것이다. 마음과 손에 더욱 날카롭게 칼을 벼리어 든 채 서로에게 다가가고 만나고 엇갈리고 헤어지며 부딪힌다. 과연 누가 마지막 승자가 되어 우뚝 설 것인가.


타락한 권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다. 뇌물을 바치고 지위와 권력을 얻는다. 전국의 땅을 나누어가지고도 더 많은 땅을 가지려, 수많은 사병들을 거느리고서도 정작 사병을 아끼려 외적이 침입하여 유린하는 현실을 외면한다. 차라리 전란을 이용하여 백성의 땅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 백성들은 안팎으로 고통을 겪지만 권력자의 곳간은 차다 못해 넘칠 지경이다. 백성의 땅을 빼앗고 저항하는 백성의 목숨마저 빼앗는다. 절망한다. 홍인방의 절망과도 닮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 나라는 끝났다. 자신을 타락케 만든 현실과 견디지 못한 자신에 복수하려 한다. 이러고도 나라인가. 상처가 곪고 썩어간다. 무지렁리 백성의 손에도 칼이 들리고 피가 흐르려 한다.


어쨌거나 무협의 전형성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실제의 역사와 부대낄 수밖에 없는 퓨전역사드라마로서의 단점을 풀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드라마다. 역사드라마가 아닌 무사들의 칼부림을 보여주기 위한 어디까지나 무협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 모순들이 납득된다. 인연을 얻고 계기를 갖는다. 칼을 들고 명징하게 서로 마주선다. 더 치열하고 치밀한 칼부림을 위한 이유다. 더 재미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