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임금의 의미 - 어떤 견해에 대해...
문득 어느 성공한 사업가의 회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라 내놓은 책 가운데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남이 성공한 이야기를 읽고 자기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망상에 허우적대는 취미따위 내게는 없다. 거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네가 제대로 돈값을 하려면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돈을 받아가며 일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하는 일의 양이 내 기대에 못미치므로 따라서 너에게 주는 돈은 지금보다 더 적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면 결국 이 사람에게 있어 임금이란 내가 사용한 노동력에 대해서만 주는 대가인 것이다. 내가 상대의 노동력을 사용해서 이 만큼의 이익밖에 얻지 못했으므로 그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급한다.
노동자의 임금과 관련해서 노동생산성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으로 사용자에게 얼마의 돈을 벌어주었는가. 돈은 사용자가 번다. 사용자가 기업을 경영해서 이익을 낸다. 거기에 노동자의 노동력이 얼마의 기여를 하고 있었는가. 오로지 사용자가 사용한 노동력만큼을 계량하여 임금으로 계산한다. 노동자는 이 판단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노동자도 먹어야 한다. 입어야 한다. 잠도 자야 한다. 가족도 부양해야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비용이다. 하기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원가를 무시한 채 그 이상의 후려치기를 강요한다. 하청기업을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소유하고 사용하려 한다. 노예가 그렇다. 노예란 자체가 인간을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써만 여기기 위한 제도일 것이다. 대기업은 돈을 벌고 노동자와 중소기업은 그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가 헐벗고 굶주려도 어차피 노동자는 그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 평생 결혼도 못하고 친구도 못사겨도 그만큼 충분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돈은 사용자가 번다. 사용자가 번 돈 가운데 노동자의 노동력이 기여한 비중은 사용자 자신이 판단한다. 아무리 기업이 높은 이익을 누리고 있어도 그 만큼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돌려주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려도 그만한 일을 하지 못한 자신의 탓일 뿐 기업의 책임은 없다. 더 싸고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할 새로운 노동자를 찾아 고용하면 그 뿐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면 그렇다면 과연 그 노동력은 누구의 소유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 하기는 그래서 노동자의 파업에 사회 전체가 비난을 퍼붓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한 소유를 기업과 사용자에서 국가와 사회로 절묘하게 옮겨놓는다. 자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노동력을 감히 노동자 개인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있다. 노동자 자신의 삶의 수준과 질을 위한 수단이 아닌 오로지 생산을 위해 소모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보장할 의무나 책임이 어디에도 없다. 문득 올초 의회에서 했던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연설을 떠올리게 된다.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을 사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사용해야 할 노동력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계약을 맺는 것이다. 하청기업이 가지는 역량을 계약을 통해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보장하고 상생을 꾀한다. 당연한 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은 단위가 아니다. 배타적이고 독립된 주체가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논쟁들에서 그 추이를 한 번 살펴본다.
노동가치설은 정확히 인간가치설일 것이다. 노동자가 하는 일의 양과 질을 말하는 것이 아닌, 그 노동력을 소유한 개인의 참여를 뜻하는 것일 터다. 노동이 개인을 부양하지 못한다. 생산이 구성원 개인을 먹여살리지 못한다. 생산으로부터 소외된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여튼 그래서 남의 돈 먹기인 것이다. 정당한 자신의 권리일 텐데도. 자신이라는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사용하는데 대한 대가다. 그런데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노동의 양이나 질이 충분치 못하다면 해고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찾으면 그만이다. 불성실은 지금도 충분한 해고의 사유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