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김대중과 노무현의 극복 - 정체성에 대해...

까칠부 2015. 10. 19. 01:08

'극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극복한 이후는 좋다. 긍정적이다.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 역시 매우 긍정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극복하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극복해야 한다. 다시말해 현재 상태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이 보여주었던 노선이나 추구했던 정책들은 현실에서 매우 미흡하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기에 보다 나은 대안으로써 그들을 대신해야만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야당이 가지는 여러 한계들이 바로 김대중과 노무현에게서 비롯되므로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야당이 그동안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을 그렇게 말 몇 마디로 야당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린다.


하기는 이해한다. 이놈저놈 다 싫다고 새로운 정치를 내세워 정치에 입문했을 터다. 여당도 야당도 다 문제라고 바르고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고 바람을 일으켰었을 터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마찬가지로 잘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자 한 이상 또다른 절반에 대한 배려도 잊어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시절 김대중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여전히 남은 갈등과 혼란에 대해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이상과 이념에 이끌려 다시 뭉치게 된 이들이 있었다. 자아비판이라도 하라는 것일까?


물론 극복해야 한다. 당연히 극복해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김대중일 것인가. 언제까지나 노무현이어야 하는가. 다만 그렇더라도 단절이 아닌 연속을 의미한다면 그때는 극복이 아닌 다른 단어를 썼어야 했을 것이다. 극복은 부정과의 단절이다. 계승은 미완의 연속이다. 아직 아쉽고 부족한 것들이 있다면 두 사람이 지나온 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면 그만인 것이다. 굳이 일부러 극복하려 하지 않아도 김대중과 노무현 두 사람을 긍정하면서 현실에 맞는 새로운 대안과 궁리들을 찾아나서다 보면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극복'이라는 단어를 공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고보니 벌써 오래전 그에 대해 썼던 적이 있었다. 야당과 안철수라는 정치인에 대해서.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고 만다. 그렇다고 따로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안이 있다면 굳이 '극복'이라는 레토릭을 앞세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일단 김대중과 노무현 두 사람을 부정한다. 부정한 상태로 규정짓는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부정하고 나면 야당엔 무엇이 남는가. 어차피 야당도 잘못이라며 비난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러나저러나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김대중에게 표를 주어 본 적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무척 싫어했었다. 노무현은 집권 이후 오히려 비판하는 입장에 선 경우였다. 그럼에도 시대가 지워준 빚이라는 것이 있다. 앞으로 어떤 정치인이 어떤 대안을 내놓든 대한민국의 야당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어 계승되었고 발전되었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일 터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판단과 사실과는 전혀 별개다.


여전히 구경꾼이다. 여전히 심판이다. 필드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끼리는 서로 비판하더라도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라는 것이 있다. 남이 아니다. 동지다. 그것이 같은 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야당에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항상 남이다. 예상했던 바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