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신 객주 - 실망스런 김학준의 죽음과 억지스러운 허술함
굳이 비녀에 독을 묻혀 찌를 필요가 있었을까? 전적으로 자신을 믿고 있었다. 아무 의심없이 자신이 내민 약사발을 들이키고 있었다. 반드시 진실을 들어야 했다면 약사발에 독을 섞으면서 양을 조절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비녀로 독을 묻혀 찌르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위험부담도 적었을 것이다. 자칫 비녀로 내리찍는 손을 김학준(김학철 분)이 막았다면 어찌되었을까?
이런 장면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었다. 이미 홈페이지의 인물소개를 통해 김학준이 천소례(박은혜 분)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학준이 죽으면서 천소례에게 길소개(유오성 분)가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아무리 원수라지만 살을 맞대고 살아온 세월이 무려 18년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있었다. 약해지려는 만큼 더 독하게 다짐하며 간직해 온 원한이었다. 그 모든 감정이 한 순간에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오게 된다. 마치 전쟁처럼. 참혹하고 잔인하며 애닲고 비장하다. 그런데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한가한 이야기들만 오가고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말이 너무 길다.
차라리 다치고 놀란 탓에 약해진 틈을 노려 지나가는 이야기인 양 슬쩍 떠보듯 물었으면 어땠을까? 천소례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천소례를 궁지로 몰아붙이는 순간 오득개(임형준 분)가 나서서 김학준의 숨을 끊어놓게 된다. 조성준(김명수 분)이 밤늦게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목숨을 끊어놓고 도망쳤다고 하는데 정작 김학준의 몸에는 납치당할 때 입은 상처를 제외하고 다른 외상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당시의 정황을 보더라도 김학준의 손에 조성준의 옷이 쥐어져 있었을 정도면 몸싸움이 있었을 터인데 주위는 크게 어지러진 것이 없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이상한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최소한 조성준이 아니더라도 다른 건장한 남성에 의해 그리된 것이라 여길만한 무엇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 공중파 드라마라서인지 주인공의 누이인 천소례에게 이 이상의 악역은 맡기지 않는다.
조성준이 살변모의로 수배된 것을 알면서도 무장정 강경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포졸들에게 들켜 쫓기는 장면도 납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마방의 소장수들이 대책없이 억세고 사나워서 마방문서를 사기도 꺼려진다더니 정작 김학준의 집으로 쳐들어와 마방문서를 내놓으라 강짜를 부린 것은 조성준과 그를 따르는 왕발이(방형준 분) 두 사람이 전부였었다. 김학준이 부리는 노비며 거느린 일꾼만 적지 않은 수일 텐데 고작 두 사람을 당하지 못해서 김학준이 직접 칼부림을 해야만 한다.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으니 오다가다 처음 만난 길소개(유오성 분)를 전적으로 믿고 도움을 받으려다 오히려 더 큰 곤경에 빠지고 마는 것 아니던가. 길소개를 의심하여 그를 찾아가 묻고자 했다면 굳이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조성준과 왕발이 포졸을 피해 도망치다 도착한 곳이 하필 천봉삼(장혁 분)이 있던 근처의 벼랑이었다. 그래야 할 필요는 인정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허술하다.
길소개의 불우한 현실도 더 이상 드라마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언젠가 주인공 천봉삼과 부딪히게 될 악역일 것이다. 그런데 사는 모습이 워낙 비루하고 누추하니 마냥 원망하기도 쉽지 않다. 김학준으로부터 이미 길소개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이라는 사실을 들은 뒤였음에도 천소례가 정작 자신의 앞에 나타난 길소개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길소개가 보이지 않고 나서야 그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된다. 더 크고 더 강했다면. 더 귀하고 더 높았더라면. 천봉삼도 그래서 그토록 미워하고 원망했던 길소개를 다시 형이라 부르며 반가이 맞을 수 있었던 것이었을 게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길소개는 적으로써 당당히 천소례와 천봉삼 남매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
분명 어쩔 수 없는 제작여건의 한계로 인한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성준과 왕발 이외의 다른 송파마방 식구들이나 다른 마방의 쇠살쭈들까지 모두 등장시키기에는 인력이며 비용이며 그 부담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필요한 인물도, 그를 위해 필수적인 사건들도 이미 벌써부터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인물과 인물을 잇고, 사건과 사건을 유기적으로 나열한다. 그 사이와 간격을 채우기가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어떤 곳은 급해지고 어떤 곳은 허술해진다. 그렇더라도 조금만 더 치밀하게 내용을 채워주었으면 어땠을까. 한 주에 2회, 무려 140분 분량의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 사치의 대가였을 것이다. 너무 마지막 가는 말이 길어지니 인생무상과 천소례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을 전하는 김학준의 유언조차 마음에 와닿기에 자신이 너무 지쳐 버린다.
신석주(이덕화 분)로부터 운명은 시작된다. 하필 개똥이(김민정 분)가 지나는 길에 조서린(한채아 분)와 함께 돌아가는 신석주의 행렬이 있었다. 차인행수 맹구범(김일우 분)을 꿰뚫고 희롱하던 무격의 신통함이 신석주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문밖에서 맹구범이 듣는다. 무당이 될 운명을 스스로 거부하며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녀는 무당이 되어 주위의 운명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로 인해 신석주에게도 빈틈이 생기고, 길소개에게도 천봉삼의 적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개똥이의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다. 원치 않는 삶을 스스로 원해서 살 수밖에 없다.
지루했다. 여전히 장사는 않고 있었다. 원망도 복수도 모두 시들했다. 너무 쉽게 잊고 납득하고 있었다. 미움도 정도 너무 가볍기만 했다. 길소개가 무엇보다 더 커져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적이 되어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바로 가까이에 있으면서 길소개로부터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 멀어진 가운데 악연만 쌓여간다. 시원해지는 때가 오기를. 답답해진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