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송곳 - 기대와 착각 '네가 더 쉬울 것 같아서'

까칠부 2015. 11. 2. 04:24

"돌아올 웃음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부러 웃어줄 필요가 없다."

"보답받을 호의가 없다는 것을 아니 애써 호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


어쩌면 전회 마지막 장면에서 이수인(지현우 분)이 혼자 읊조리던 이 두 문장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시작이며 끝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것이다. 나만 열심히 하면. 나만 착하고 성실하게 시키는대로 군말없이 열심히 일한다면. 그러면 알아줄 것이다. 반드시 보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란 일방적인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사업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사용자의 권리이듯 불필요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징계하는 것 역시 사용자에 속한 권리다. 노동자는 바로 그 사용자가 소유한 사업장에서 일하고 임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다. 한순간의 변덕으로도 얼마든지 노동자는 자신의 소중한 생계수단을 잃을 수 있다.


형이라 불렀었다. 친형처럼 믿고 따르며 부탁하는 것은 뭐든 다 들어주었었다. 그러니 자기를 더 챙겨주지 않을까. 자기를 더 생각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네가 더 쉬울 것 같았다'는 너무나 쉬운 한 마디였다. 자기를 형처럼 믿고 따르니까. 자기를 자기편이라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더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 쉽게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신뢰가 오히려 자기의 목을 조이는 올무가 되어 돌아온다. 차라리 아무 기대도 않았더라면. 어차피 회사와 자기는 전혀 별개라며 철저히 거리를 두고 대해왔더라면. 관리자로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회사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야 한다. 허과장(조재열 분)의 선의를 믿었던 것처럼 회사의 선의 역시 너무 믿고 말았다.


그래서 더 큰 역설로써 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회사는 정규직인 지금의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기로 결심을 굳힌 뒤였다. 해고로 인한 부담과 비용을 줄이려 자발적으로 그만두고 나가도록 불법을 동원해 직원들을 압박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동료인 황준철(예성 분)이 사표를 써야 할 위기에 몰렸는데도 자기의 사정만을 이야기하며 나서는 직원이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이성과 논리로써 다른 이들을 설득한다. 자기만 나서지 않으면. 자기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자기만 나서지 않는다면. 커다란 손이 자신의 목을 비틀려 하는 그 순간까지도 손의 주인을 믿으며 죽어가는 동료를 외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계수단을 바로 저들이 소유하고 있으니까. 푸르미에서 일하는 직원들만이 아니다. 푸르미에 납품하는 업체의 임원이며 직원들까지 혹시라도 납품에 지장이 있을까 적지 않은 인연과 친분에도 감히 황준철을 위해 증언하기를 거절한다. 목숨줄을 쥐고 흔든다. 어쩌면 악역일 수 있는 정민철 부장(김희원 분) 역시 그같은 구조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주요임원들이 모두 외국인인데 외국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어떻게든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만큼 더 절박하고 필사적이다. 다른 사람의 사정따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부장에게서 다시 과장에게로, 과장에게서 직원들에게로. 과연 자신의 생계까지 포기해가며 다른 이를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수인 과장이 주인공인 것이다. 드라마의 제목 그대로 그같은 엄밀한 구조에서 비져나온 송곳과 같은 존재다.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따돌리고 뒤에서 험담을 한다. 부적절한 행동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당하니까. 옳지 못하니까. 자신의 일이 아니더라도 불이익을 감수해가며 남을 위해 나서서 지키고자 싸우려 하는 이들이 있다. 동료의 일이기에 주강민(현우 분) 등도 이수인을 중심으로 모여 행동을 함께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이 힘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가 있다. 합법적으로 원칙과 절차를 지켜가며 단결하여 대항한 순간 사용자 역시 마음대로 직원을 해고하거나 징계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요!"


하기는 여전히 타인일 테니까. 타자란 항상 객관화된다. 객관화란 대상화다. 이상적인 인상을 강요한다. 남자니까. 여자니까. 군인이라면. 회사 직원이라면. 공장노동자라면. 약자니까 선할 것이라 기대한다. 열등한 위치에 있으니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이다. 하지만 강자든 약자든 같다. 모두가 인간이다. 때로 악하고, 때로 비겁하고, 때로 이기적이며, 때로 탐욕스러운, 한심할 정도로 시시하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별 것 없는 그런 아무렇지 않은 존재.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것일 터다. 악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다. 설득하여 납득시키고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다. 사용자를 몰아내봐야 결국 그곳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자신의 일터다.


인간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과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자기는 약자가 아니라고 여긴다. 자기는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구분짓고 판단한다. 평가하고 단정짓는다. 자신을 저들로부터 분리할 이유를 찾아낸다. 메시지를 비판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한다. 사소한 도덕적인 문제가 본질을 가린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자기의 정의에 사로잡힌다. 구고신의 단호한 한 마디가 이수인의 혼란을 일깨운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누구를 지키려 싸우는가. 자기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자체만으로 무슨 큰 죄라도 짓는 것 같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랬더니 회사를 뒤집어엎고 경찰차에 불지르는 것부터 떠올린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하는 자체가 헌법이 보장한 합법적인 권리라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노동자의 권리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아닌 사용자와 정부의 온정에 기대는 것이다. 설마 자기만은. 자기한테만은. 노동자로서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인가 전혀 관심도 자각도 없다. 취업규칙이 무엇인가 심지어 인사담당자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착하다 말한다. 성실하다 말한다. 착하고 성실한 노동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옥을 보지 않았다. 구고신은 황준철을 위한 증거를 찾고자 찾아간 단란주점에서 아픈 과거의 후회와 만난다. 역시 외국계 기업이라 노조와 노동자에 대해 무척 신사적이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보지 않았으면. 차라리 눈돌리고 모르는 일이라 여기며 지냈더라면. 그래도 드라마일 테니까. 일상을 벗어난 꿈과 희망을, 위로와 즐거움을 그로부터 얻으려 할 테니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너무 현실일 것이다. 드라마는 역시 즐거워야 한다. 재미있어야 한다. 이수인만의 침착한 열정과 따뜻한 냉정함이 배우 지현우를 통해 고스란히 TV화면에 옮겨진다. 차라리 웃을 수밖에 없는 구고신의 눈물은 곧 배우 안내상 자신이었을 것이다. 두 중심배우의 연기가 훌륭해서 차라리 드라마가 답답해진다. 불편해진다. 상업드라마로써 영리한 선택은 아니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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