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 길태미와 이방지, 당대와 장래의 삼한제일검이 부딪히다!
마침내 당대의 삼한제일검과 장래의 삼한제일검이 만난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당대의 최고수와 아직 무명에 가려진 젊은 신진이 사고처럼 만나 서로 칼을 맞대고 승부를 겨룬다. 당연히 무승부. 서로가 가진 칼로써 깨뜨리기에는 서로의 칼이 너무 단단하고 예리하다. 아쉬움만 남긴 짧은 칼부림이었지만 역사가 비로소 크게 요동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런 맛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무협의 재미라는 것일 게다. 고작 칼부림이다. 칼잡이들이 칼을 휘두르며 죽이네 살리네 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유를 붙인다. 의미를 더한다. 역사를 바꾸려 한다. 시대를 바로잡으려 한다. 그 위에 삼한제일검이라는 이름까지 더해진다. 삼한에서 재일 강하다. 고려에서 제일 칼을 잘쓴다. 결국은 누가 제일 센가 하는 유치할 정도로 원초적인 물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강자가 휘두르는 칼끝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단순해서 진지하고, 심각해서 더 단순해진다. 무협의 매력이다.
여러 요인들이 겹치며 일어난 우연이고 오해였다. 홍인방(전노민 분)으로 인해 고향마을이 풍비박산났다는 소식을 늦게서야 들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 더이상 참고 있을 수 없다. 하필 바로 직전 참혹하게 헤어졌던 어릴적 첫사랑 연희(정유미 분)와 다시 만나고 있었다. 헤어져 살아온 시간들 만큼이나 되돌릴 수 없는 서로의 거리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서로의 상처가 깊었고 서로를 향한 원망과 죄책감마저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상처를 후비듯 다시 고향에서 권문세족의 가노들이 분탕질을 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홍인방을 죽이겠다. 대의도 무엇도 아닌 단지 복수이고 분풀이일 뿐이었다.
권력이란 마물이다. 이인겸(최종원 분)의 말처럼 길태미(박혁권 분) 역시 어느새 하나의 파벌을 거느린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홍인방으로 인해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길태미와 같은 속물적이고 본능적인 인물마저 권력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보다 현실적이지만 권력이란 현실보다 더 탐스럽고 매혹적이다.
당장은 재산의 절반을 내놓더라도 이인겸 앞에 바짝 엎드리자. 이인겸의 용서만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이성계(천호진 분)를 불러들여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정도전(김명민 분)이 의도한대로 몇 번이나 입장과 생각을 바꾸며 혼란스러워하다가 비로소 길태미를 통해 구명줄을 잡는다. 안변책을 통해 개경에서 이성계의 입지를 다지려 했던 정도전의 계획이 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권력이라는 마력에 사로잡힌 군상들의 심리까지 모두 꿰뚫을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땅새가 복수와 분풀이를 위해 홍인방을 찾아갔던 것이었다.
벌써부터 최영(전국환 분)과 이인겸이 자신을 쳐내려는 것을 홍인방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쳐내려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바로 자객을 보내어 자신을 죽이는 것이었다. 백윤이 그랬던 것처럼 흉수는 공공연한 비밀로 남고 당사자가 사라진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의 차지가 되고 말 뿐이다. 이미 하나의 파벌을 이끌고 있는 자신을 정상적으로 제거하려면 상당한 수고와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그 방법이라면 하룻밤만에도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
오히려 길태미를 통해 이미 살 길을 열어준 뒤이기에 더욱 당대 최고권력자 이인겸의 음험한 속내를 의심하게 된다. 당장 이인겸의 약속을 믿고 홍인방을 설득하려 했던 길태미조차 복면을 한 자객을 본 순간 이인겸을 떠올리고 만다. 자기가 퍼뜨린 씨다. 이인겸에 대한 오해는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로 그를 몰아넣는다. 정도전이 파놓은 함정에 제발로 걸어들어가고 만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권력을 놓을 수 없다. 독을 품으면 독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다.
아버지 이성계의 직인까지 훔쳐서 정도전에게 거짓명령을 전한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순순히 아버지에게 불려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했을까? 아니면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한 번 설득을 시도해 보아야 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방원(유아인 분)은 자신을 잡아들여 죄를 물으려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리어 제발로 홍인방을 찾아가 처음 정도전이 의도한대로 도방에서 안변책이 통과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자처한다.
선죽교에서 정몽주(김의성 분)를 죽이던 때도 그랬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형제들을 죽이던 때도 다르지 않았었다. 목적과 결과가 동기와 과정을 정당화한다. 다시 한 번 선명히 드러나는 이방원의 집요한 권력의지일 것이다. 자신을 뒤쫓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려는 형마저 무휼(윤균상 분)을 시켜 제압해 나무에 묶어 놓는다. 이미 아버지를 벗어나, 정도전과도 상관없이 스스로의 의지로써 그는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어느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도방의 묘사가 흥미롭다. 의회가 아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대표한다. 실제의 역사와도 상당부분 부합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왕을 등에 업었다고 혼자의 힘만으로 최고권력자가 되기에는 정치란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인임의 권력을 용인하고 그를 뒷받침한 다른 이들이 있었다. 이인임과 이해를 같이하며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했다.
이인임이 은퇴하고 임견미와 염흥방이 그를 대신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왕의 결단에 의해 최영이 이인임을 쳐냈을 때도 함께 움직인 힘들이 있었다. 도방은 바로 그같은 고려의 다양한 권력주체들이 모여서 의견을 교환하고 입장을 조율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이인겸이라는 최고권력자가 있어도 그의 결정과 판단은 모두의 의지와 합의에 따른다. 사실과 다를 수는 있지만 고려의 정치는 바로 이렇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미지로써 보다 선명하게 구체화시킨다.
최영과 이인겸의 서로 다른 입장차가 드러난다. 너무 쉽게 자기를 포기하기에 믿을 수 없다. 쉽게 자신을 낮추고 굽힐 수 있으니 오히려 믿을 수 있다. 길태미가 말한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굽히고 엎드리는 것이다. 너무 빠른 포기는 진심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에는 진심따위 필요없다. 의도한 것이었을까. 그 구도는 길태미와 홍인방에 의해 반복된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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