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논란과 아이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했었다. 그래서 나이답지 않게 매우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고 야무지다고. 뭔 말이냐면 그만큼 현실에 민감하다는 뜻이다. 당장 확신없는 오늘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과연 오늘은, 내일은, 어떻게 이 버거운 일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의 믿을 수 없는 성공에 오히려 위화감을 느낀다. 이대로 좋은 것일까? 이것으로 끝인 것일까? 아이돌의 수명이 짧다는 것을 안다. 연예인으로서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도 안다. 언젠가 내려갈 것이다. 언젠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런 불안이 때로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 이어진다. 차라리 사향주머니를 물어뜯어 없애면 사냥꾼이 자기를 잡으려 쫓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아이유에게서 보이는 실수 아닌 의도된 논란들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다. 아이돌이기를 거부하고 싶어한다. 아이돌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이돌이기를 바라는 대중과 그들을 배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다. 대중으로붵 외면받는 순간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이다.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대중이 자신을 기대하는 동안만이다.
대중이 바라는 자신이란 어떤 자신인가. 대중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보이며, 대중은 어떤 자신을 소비하고 있는가. 사실 그같은 괴리는 많은 연예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이 보는 자신과 스스로가 보는 자신이 전혀 다르다. 어떤 것이 진짜 자신인가. 그럼에도 대중이 요구하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와 환멸이 잠재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번 아이유의 새앨범 수록곡 'Zeze'의 가사는 바로 그런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 게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제제가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에 자신을 투영했듯이 아이유는 바로 그 '밍기뉴'를 매개로 소설의 주인공 제제에게 자신을 투영하려 한다. 제제를 학대하는 어른들이란 자신에게 아이돌의 이미지를 강요하려는 대중이며, 제제는 그런 대중들로 인해 억압받는 불행한 자신이다. 그럼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때로 그것을 능숙하게 이용하려는 것은 모순이고 기만이다. 그런 자신을 비난한다.
아이유가 어린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솔직히 그렇게 해석할만한 여지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과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래에서 화자가 되는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가 아이유 대신이었는가. 그렇다기에는 제제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다. 자기의 대신이라기에는 단지 밍기뉴의 눈과 입을 빌어 제제를 묘사하고 제제에게 말하는 것으로 가사의 대부분이 채워져 있다. 특정한 대상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무의식의 결과이거나. 아니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제제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제제를 보는 밍기뉴의 눈과 입을 대상화한다. 문득 우연히 스치며 보았던 아이유의 뮤직비디오에서 젖병을 물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다는 보지 못했지만 몇몇 노래의 가사에서도 일관된 의도가 노출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어린 소녀를 연기해야 한다.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님에도 여전히 대중이 바라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거부해야 함에도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마저 느낀다. 대중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어린 인형이다.
앨범 전반에서 느껴지는 기괴함과 난해함은 그를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마치 중학생 어린 소녀가 어른 흉내를 내어 화장을 하는 것과 같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것은 그만큼 어린 소녀가 아닌,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 한 사람의 성인이고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껍질을 벗으려 과도한 가면을 쓰고 만다.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낯설다. 대중이 아이유에게 바란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대중이 아이유에게 기대했던 것도 지금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라임오렌지나무 밍기뉴가 꾸짖는다. 그러지 마. 그래서는 안돼. 어린 꽃을 꺾어. 다시 어린 너로 돌아가.
확실히 한 번 관심에서 밀어내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일부라 욕하기 위해서도 다시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 한 번 안티면 그냥 영원히 무관심이다. 안티까지는 아니다. 드라마는 재미있게 봤다. 단지 아이유라는 가수 자체에 관심이 없다. 노래하는 스타일이 내 취향이 아니다. 음색도 창법도 나와 그다지 맞지 않는다. 아주 늦게서야 한창 시끄러워지고서야 겨우 이런 일이 있었구나 안다.
어른이 되고 싶은 - 아니 이미 어른이 되어 있는 한 여성과 여전히 소녀이기를 기대하는 많은 대중들, 그것을 거부할 수 없는 소녀와 소녀를 제단에 올리려는 수많은 어른들. 굳이 성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면 그 대상이 되는 누군가에 대한 것이라 여기는 편이 옳지 않을까. 타자화된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다.
한 가지는 확실한 듯하다.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의 내면의 이야기를 대중들에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마저도 객관화하는 방법을 안다. 다만 지나쳐서 오히려 오해를 더 키우고 마는 결과를 낳았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을 비추어 본다. 자신을 이야기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은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희재 선생님의 동명만화를 읽고 문득 호기심이 일어 용돈을 헐어 동네서점에서 사서 읽었을 것이다. 아마 그때도 나 역시 어린 제제에게 자신을 투영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었다. 새삼 떠올려 본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