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정도전의 선택, 이상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까칠부 2015. 11. 10. 05:24

아마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하게 되는 고민일 것이다. 눈앞에 쉬운 길이 놓여 있다. 다른 길은 한참 저 멀리 힘들게 돌아가야 한다. 한참을 멀리 돌아가야 하는 대신 자신의 원칙과 양심을 지킬 수 있다. 쉽고 빠른 대신 원칙과 양심을 저버려야 한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이 꿈꾸는 혁명을 위해서는 이방원(유아인 분)이 순군옥에서 누명을 쓰고 고문받다가 죽는 것이 더 유리하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천호진 분)의 직인을 훔쳐 안변책을 위조해서 도당에 올린 사실이 가려진다. 아들을 잃은 이성계의 분노가 아들을 죽인 이인겸(최종원 분)에게로 향하며 궁극적으로 이인겸을 정점으로 한 고려의 기득권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정도전(김명민 분) 자신이 중간에서 방향과 속도만 조절해준다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자신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과 이방원을 꾸짖던 땅새(변요한 분)의 비통한 외침이 흔들리던 그의 이성을 일깨운다. 아무리 높은 이상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 역시 살아있는 인간들이어야 할 터였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누군가의 이웃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다. 어쩌면 잊고 있었을 그 원통함이 바로 앞에 자신을 찾아와 외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충분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지 높은 이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것을 외면해야 하는가.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한다. 더 먼 길을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이방원을 꾸짖었을 것이었다. 느리게 가는 길이야 말로 정도라고. 어렵게 가는 길이야 말로 바르게 옳게 가는 길이라고. 흔들리고 있었다. 유혹받고 있었다. 더 쉬운 길이 있다. 더 편한 길이 있다. 더 빠른 길이 있다. 혹시라도 그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희(정유미 분)의 우려는 예언이었을 것이다. 부끄럽고 싶지 않다. 자신을 기다리다 죽어갔던 아이들에게. 자신이 속죄하려 하는 그 아이들에게. 분이(신세경 분)도 말한다. 이방원도 자신과 같다. 분이도 이방원도 그 아이들과 같다.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희망을 기다리는 가엾은 아이들과 같다.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혼란이 있었기에 결심이 굳다. 유혹이 있었기에 확신은 더 강해진다. 문득 JTBC의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의 대사가 떠오른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다. 아무리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폭두이고, 그래서 혁명에 있어 예측할수도 통제할수도 없는 불안요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방원 또한 희망을 꿈꾸며 기다리는 수많은 고려의 민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과 지켜야만 하는 신념이 그렇게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완고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고집하는 이성계와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의 건국은 순간의 편리가 아닌 더 멀고 더 어렵고 더 힘든 더 가치있는 이상을 위해 이루어졌다.


정도전이 홍인방(전노민 분)과 차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 육신의 고통을 피해 변절했고, 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복수를 다짐했다. 복수의 과정에서 탐욕과 쾌락을 거절하지 않고 마음껏 누렸다. 그 안에 동화되어갔다. 홍인방에 이방원에게 가지는 미련의 정체일 것이다. 감히 눈앞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분이를 보며 짓는 웃음의 정체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후회와 환멸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과거에 대한 미련이고 증오다. 어쩌면 이방원 역시 죽는 그 순간까지 끌어안고 가야 했던 영혼의 짐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당장의 편리를 위해 더 쉬운 길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더 높은 이상을 위해 더 먼 길을 가려 한다. 역사의 승자는 누구인가. 아이러니일 것이다. 멀고 힘들다는 말은 좌절도 절망도 항상 가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만큼은 결코 쉽게 꺾이지 않는다.


탐욕으로 얽힌 과두체제의 태생적 약점이었을 것이다. 이익이 있기에 모였고 필요가 있기에 뭉쳤다. 아무리 이성계에게 징치해야 할 잘못이 있어도 그를 위해 자기가 손해봐야 한다면 마땅히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고려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인겸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다. 권위로 누르고 힘으로 강제하려 한다면 자신의 편에 섰던 도당의 권문세족들은 다시 자신의 반대편에서 자신을 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성계의 가별초가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고려조정과 도당의 권문세족의 힘을 모두 합치면 변방의 일개 군벌이 가진 사병따위 어렵기는 하겠지만 제압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자신이 피해입고 손해보는 것이 두렵다. 그 실체를 정도전은 적확하게 꿰뚫어본다.


고려말의 혼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탐욕이 권력마저 사유화한다.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할 재정과 군사력마저 사유화하여 개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최영과 같은 명장이 이끄는 고려군은 왜구를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군이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필요한 곳에 목적에 맞게 쓰이지 못한 것이었다. 부패한 자가 유능하다면 결국 그 유능함은 개인의 탐욕을 위해 쓰이기 마련이다. 개인의 이기에만 집착하는 유능이라면 결국 공적인 책임에 있어 무능과 같을 것이다. 욕심만 많다. 자기 욕심 챙기기에만 능력을 발휘한다.


이인겸의 오판이었다. 장남 이방우(이승효 분)의 적절한 판단이었다. 방심하고 있었다. 이성계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가진 힘이란 단지 마음을 달리 먹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더 큰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 계기가 필요했다. 동기가 필요했다. 명분이 필요했다. 아들의 위협은 아버지로서 일어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방원은 용을 낚을 미끼가 아닌 용을 도발하는 화근이었다. 한 번의 선부른 승리가 이인겸으로 하여금 자만하게 만든다. 실수는 자만에서 비롯된다.


호발도와의 싸움에서 이성계가 승리했다. 북쪽의 위협을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을 잡고 위협하려는 적과 만나러 개경으로 향한다. 이인겸의 계략을 역이용한 정도전의 독이 이방원을 죽일 수 없는 사정을 만들어낸다. 아들을 구하고 이성계는 다시 정도전을 만난다. 아직까지 홍인방과 길태미(박혁권 분)는 이성계와 같은 편에 서 있다. 이인겸과 대립한다. 역사가 스포일러다. 그 과정을 기대한다. 아직 땅새는 나설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청산별곡'이 아쉽다. 고려가요 가운데 유일하게 악보까지 남아있는 경우일 것이다. 현대에 와서 대중가요로 편곡된 것을 땅새가 부른다. 남아있는 원래의 곡은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분이의 역할이 애매하다. 비중이 클수록 흐름을 깬다.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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