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 이수인의 눈물,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현실의 무게 앞에서
이상과 현실이 충돌한다. 비로소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반드시 지키고픈 신념과 정의가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과 만나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대로라면 자신 역시 부서지고 말 것이다. 자신이 간절히 지키고자 했던, 다시 돌아가고픈 일상들마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시한부 통보를 받은 환자의 그것과 닮았을 것이다. 예정된 절망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만 있느니 차라리 아무거라도 해보고 당장의 불안과 두려움을 끝내고 말겠다.
그토록 의지하던 구고신(안내상 분)의 절망과 좌절을 엿보고 만다. 오로지 옳고 바른 것만을 추구하는 이수인(지현우 분)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밝은 표정과 말투로 낙천과 당위를 이야기하던 구고신이건만, 그러나 현실 앞에서 그는 너무 쉽게 타협하레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었다. 자기가 힘들게 조직한 일반노조를 위해 이수인 자신의 사관학교 경력과 대기업 과장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려 행사에 불러들이고 있었다. 자존감이 낮은 노조원들을 위해 민원을 받고 출동했다는 말단경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 잘못도 없을 말단경관에 대한 미안함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하지만 깨닫고 만다. 벌써 수십년도 더 지난 옛날일이었다. 아예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더라도 무심하게 기억에서 지운 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었다. 상대 역시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보면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현재에만 충실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일부러 아는 체 않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면 전혀 상관없는 사이로 모른 체 지나갈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여전히 구고신의 시간은 그 시절 자신이 고문받던 그 순간에 멈춰 있었다. 그토록 강하고 낙천적이던 모습과는 다르게 우연한 만남에도 그의 시간은 다시 거꾸로 흘러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십년의 시간도 그를 그 참혹했던 기억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영혼에 새겨진 낙인이다. 구고신이 운동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각오해야 했고 짊어져야 했던 것들이다. 그 끝없는 절망과 고통의 무게들이다.
"고신아, 그땐 우린 어렸어!"
꺾이고 찢기고 부서진 빈 자리에는 차라리 죄책감과도 같은 후회만이 남고 만다. 왜 그랬을까? 무엇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 않았더라면. 차라리 남들처럼 고개돌리고 눈감았더라면. 정의로웠음을 후회하고, 양심에 충실했던 것을 반성한다. 인간의 양심이, 인간의 존엄이, 인간 그 자체가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뒹굴고 만다. 그런 참혹함을 지금껏 견디며 버텨왔던 것이었다. 구고신이 회상을 통해 들려주는 잔인한 고문 앞에 자신이 허물어져가던 과정들은 그를 위한 것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 아니 그렇기 때문에 구고신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그들의 빈자리를 남아 지키고 있다. 과연 자신은 그럴 수 있겠는가. 가족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마저 모두 저버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구고신이 꺾이지 않은 대가라면 정민철(김희원 분)은 스스로 굽히고 타협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구고신처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장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몸은 끝없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몸은 병들고, 남은 가족조차 없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다. 그에 비하면 내세울 것 없이 비루하고 한심한 몰골이지만 회사와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탓에 정민철은 벌써 부장까지 되어 있었다. 앞으로 어디까지 더 올라가게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을 기준으로 할 때 더 많은 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에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것은 바로 정민철 부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싶어지는 유혹이 정민철 과장의 솔직한 고백에 담겨 있었다. 가장 무섭다. 어느새 그를 연민하며 논리에 동의하고 그를 따라가고 싶다. 하필 구고신이 지나온 고난의 시간들을 알아버린 그때 정민철이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울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았다. 구고신의 모습에서 애써 잊고 있던 두려움을 다시 일깨우고 말았다. 정민철과의 대화에서 외면하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는 자신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어떻게든 끝까지 버티기는 버틸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뒤에는? 자신에게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자신은 또 무엇을 각오하고 책임지게 될 것인가? 구고신이 자신의 미래라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정민철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자기가 자기를 부정한다. 자기가 자신을 반성한다. 지나온 길을 지우고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둔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후회가 생기기 전에 차라리 부서져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겁한 것이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민철을 닮아간다. 그것을 자신이 안다.
구고신이 한때 동지였던 오랜 친구의 자괴어린 고백에 눈물을 흘리고 마는 이유였다. 이수인이 눈물을 보인 이유와 같았을 것이다. 이수인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구고신에게는 이미 지나온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포기하고 떠났을 것이다. 혹은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벽에 부딪혀서. 혹은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꺾이고 타협하면서. 그렇더라도 말없이 그저 선 자리만 바꿀 수 있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함께했던 순간들은 남는다. 그런데 서로가 함께했던 순간들마저 적으로 돌리고 마는 이들이 있다. 새로운 자리를 위해서. 새롭게 시작된 시간들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우려 한다. 모두가 떠난 빈 자리를 홀로 지키고 섰을 때 느끼는 것은 고독일까, 허무일까?
이번회차만큼은 다름아닌 주인공 이수인 자신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 만큼이나 크고 복잡한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초인이 아니다. 역시나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다. 다른 사람들 만큼 두렵고, 다른 사람들 만큼 겁이 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유혹에도 흔들린다. 구고신과의 사이에서도 충돌이 빚어진다. 이수인의 이상과 구고신의 현실이 어울리지 못하고 부딪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때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번의 파업결정은 단지 이수인 자신이 편하기 위한 자기파괴적 행동이다. 주강민(현우 분)의 폭력이 이수인에게 다시 계기를 만들어준다. 자기 자신이 아닌 모두를 위해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노조의 투쟁은 결국 사용자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전제하고 있을 것이다. 노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회사에 손해가 생긴다면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용자들은 아예 노조를 인정하느니 회사가 손해를 보고 말겠다며 노조를 와해시키는 것은 최우선목표로 여긴다. 하기는 어차피 노조의 쟁의로 말미암은 모든 피해는 그 이상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상 노조의 투쟁으로 인한 기업의 손실은 노조 자신이 차후에 배상해야 할 비용인 셈이다. 파업이 전혀 사용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고작 파견직 여직원 하나 해고하겠다고 매출에 손실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매대를 비우고 위약금까지 물어가며 거래처와 계약을 해지한다. 하지만 심지어 노조를 인정하기 싫어 아예 회사를 폐쇄하는 경우마저 현실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기업은 오로지 이윤을 최우선목표로 여긴다. 그러나 자본이 아닌 개인에 종속된 사기업의 경우 사용자 개인의 감정이나 자존심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매대가 빔으로 인한 매출의 손실보다 노조의 존재가 회사에게는 더 큰 위협이고 손해다. 수치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여기는 사용자, 혹은 임원이나 관리자들이 있다. 노조가 무력해지는 이유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 행위들을 용인하는 사회적 제도와 관습에 있을 것이다. 검찰이 사용자의 불법을 고발한 노동자에게 합의와 취하를 강요한다. 사용자의 불법은 처벌받지 않는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같은 노동자라고 해서 항상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가. 당장 인포와 매대가 있을 것이다. 더 크게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도 있을 것이다. 특정 집단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당연히 집단 내부의 이해관계가 비례해서 더 복잡해진다는 뜻일 것이다. 일부러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다른 직원들의 노조가입을 유도한다. 안에서부터 서로 싸우도록 만든다. 노조관계자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행동을 유도하기도 한다. 지능적이다. 어떻게 하면 노조를 안에서부터 와해시킬 수 있는가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손에 있다.
역시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수십년이나 지났건만 구고신의 싸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적이다. 노동자 자신도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있다. 절망은 구고신에게 비겁해지고 교활해지기를 요구하고, 좌절은 이수인마저 스스로 눈물짓게 만든다. 타락하거나, 아니면 부서지거나. 절박한 궁지에 몰린 이수인이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절망부터 배운다. 친구이기를. 이웃이기를. 동료이기를. 하지만 서로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다. 현실은 항상 버겁다. 무겁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