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큰치킨에 반대했던 걸 후회하는 이유...
당연히 나도 치킨 싸게 먹을 수 있으면 좋다. 동네 치킨집보다도 더 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반대했다. 왜? 결국 모두가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면 가격으로 승부보는 동네치킨집이나, 혹은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의 프렌차이즈 치킨집들은 어찌하는가? 이미 자본의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데 나 하나 좋자고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노동개혁에 대한 자영업자들의 여론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적은 임금만을 주고, 더 쉽게 해고하면서,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라 한다. 그것을 자영업자들이 거의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남 일이니까. 매일같이 찾아가는 손님이라도 결국은 남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역시 자영업자들은 남이다.
바로 이런 게 연대라 하는 것이다. 남양유업의 갑질이 내게 무슨 큰 상관이 있겠는가. 갑질의 피해자와 내가 무슨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남의 일임에도 내 일처럼 분노하고 일어나서 행동으로 보여준다. 아직도 나는 남양유업의 제품은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한다. 노동자가 중소자영업자의 편의를 봐주고, 중소자영업자는 농민의 처지를 살피고, 농민은 노동자의 입장을 돌봐주고. 그래야 이 각박한 현실에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부당하고 불리한 조건들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니니까. 남 돈 더 받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남들 편히 직장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 노인을 공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번 교과서국정화와 세월호, 그리고 노동개혁에 대한 노인들의 압도적인 입장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과 적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에게 불이익을 준다.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나에게 손해로 돌아온다. 어찌해야 할까? 이미 노인들은 자신보다 젊은 세대들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고통과 불이익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진중권이나 박노자 같은 진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 쉽게 실망하고 쉽게 절망한다. 구고신이 될 수 없다. 이수인도 될 수 없다. 정민철도 될 수 없다. 정민철은 그나마 회사라도 믿는다. 아무튼 저들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었으니 나 역시 불이익으로 화답하겠다. 굳이 일부러 내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중소자영업자의 가게에서 소비를 하지 않겠다.
그들이 고객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져야 더 많은 소비를 할 것이라는 사실도. 사장 소리를 듣다 보니 진짜 사장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몇 안 되는 종업원에게 사장노릇하는 맛에 자신이 진정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를 잊는다. 이수인의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은 약자가 아니다. 연대해야 하는 약자에 속하지 않는다. 화려한 착각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소비를 해주어야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줄 테니까. 대기업이야 실적이 조금 나빠져도 어떻게 버티지만 중소자영업자들은 매출이 약간만 줄어도 그대로 폐업해야 한다. 고타마 싯달타의 고뇌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가련함이 바로 인간인 것일 터다. 우울하다. 생각만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