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대공황, 그리고 뉴딜...
요즘은 모르겠다. 그러나 예전 내가 학교다니던 때는 뉴딜이라고 하면 '테네시강 개발계획'이 거의 전부인 것처럼 배우고 있었다. 혹시 아는가. 뉴딜에서 가장 중요한 두번째 백일 가운데 '전국노동관계법'과 '사회보장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자는 한 마디로 모든 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화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회적 취약자들에 대한 지정지원을 하는 법안이었다. 안가르치는 이유가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공황은 이미 19세기 초기자본주의 시절부터 예견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진단은 매우 직관적이면서 정확하다. 자본주의가 무한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증가로 인한 수입이 온전히 생산참여자 자신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생산참여자 역시 늘어난 수입으로 늘어난 생산을 소비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생산의 증가로 이어지며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하나의 법칙이다. 일정수준에 이르면 소비의 증가는 절대 생산의 증가를 따라잡을 수 없다. 자본의 성장은 생산의 증가로 이어지지만 소비의 증가는 생산의 증가에 미치지 못한다. 돈이 없어서 대공황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은 넘쳐났다. 넘쳐나는 돈을 설비에 투자했는데, 그러나 정작 생산한 제품을 사줄 소비자가 없었다. 그래서 망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이윤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자본이 가져가는 몫 만큼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줄어들며 자연스럽게 소비의 증가 역시 제한된다. 요즘은 이것을 자본소득의 증가가 노동자의 임금소득의 증가를 넘어선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를 요구하는 자체가 결국 투자한 자본의 이익을 회수하고자 하는 투자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테니 말이다. 당연한 투자자의 권리이기는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당연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케인즈 등 여러 다양한 주장과 입장들을 취합하여 루즈벨트는 대공황을 타개할 대안으로써 실질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의 증가에 주목하게 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인이 소비할 수 있는 실질소득을 늘릴 수 있도록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테네시강 개발계획은 그런 일환에 불과했다. 건설회사들에 돈을 벌게 해주려는 목적에서가 아니었다. 실제 고용되어 현장에서 일하게 될 노동자들에게 임금소득을 쥐어주기 위해서였다. 사회보장법과 전국노동관리법 역시 그런 의도로 제정되었다.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킴으로써 고용과 소득을 안정시켜 그들이 소비시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한다. 농업조정법 같은 무리한 정책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은행의 구조조정을 통해 자본시장의 투명성과 신뢰를 확보하려는 시도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뉴딜은 진짜 공황타개에 효과가 있었는가.
사실 미국이 대공황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은 뉴딜의 영향이 아니었다. 바로 앞서의 문단들에 그 이유가 다 들어 있다. 소비가 늘어나야 한다. 대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비대화된 자본을 소비가 완전히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이제까지의 정책들만으로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위기도 있었다. 그런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바로 2차세계대전이었다. 거의 무한히 들어가는 군수물자의 생산에 이미 넘쳐나는 미국내 산업설비들이 동원되면서 소비의 부족은 완벽을 넘어 해소되고 있었다. 미국이 마음이 좋아서 공산주의 소련에까지 군수물자를 지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군수물자를 생산할수록 미국의 경제는 살아난다. 역시 충분한 소비의 증가 없이 생산의 증가는 의미없다. 오히려 경제를 더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갈 뿐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기축통화체제를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런 교훈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화폐정책을 위해서는 금본위제를 먼저 폐기해야 했다. 무한생산이 무한소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본의 이익과 노동의 소득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화폐가 충분히 시자에 공급되어야 했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미국이 발행하는 기축통화 달러는 그렇게 2차셰계대전 이후 세계의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두 개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었다. 생산한 상품을 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자본가와 노동자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나눠가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게는 있었다. 어느 순간 미국이 생산한 달러라는 화폐의 가치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현물과 서비스의 가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몇 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그 모순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몇 년 전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였다. 갈 곳을 잃은 자본이 투자해서는 안되는 곳에까지 무리하게 투자하다 끝내 탈이 나고 말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2차셰대전 이후로 영원할 것 같던 자본주의의 번영과 성장은 결국 미국이라는 소비시장과 달러라는 기축통화에 전적으로 의지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소비가 위축되고 미국의 재정적자가 줄어들면 그 여파는 세계에 미치게 된다. 중국이 그동안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소비시장으로서도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신규시장으로서의 가치는 있을 지 몰라도 지속성과 안정성에 있어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단순히 생산만 늘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돈만 많이 벌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소비다. 수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수입이다. 세계단위에서도 그렇다면 국내단위에서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비 없이 생산은 유지될 수 있는가.
오바마 정부의 정책이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롭기만 하다. 뉴딜의 현대판일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오바마케어를 통해 개인의 의료부담을 줄이고, 나아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할 노조를 지원한다. 자국의 산업을 자국의 영토 안에 묶어두기 위한 많은 시도들은 자국 시장의 충분한 성장을 전제한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의 해결을 위해 발행한 막대한 달러를 소비시장이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자본가들조차 최저임금의 상승을 환영하고 있다. 노동자의 소득을 늘려 상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자신의 부도 영원할 수 있다.
어째서 굳이 이런 글을 쓰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러고 보면 2008년엔가 이 비슷한 내용을 다른 블로그에 쓴 적 있을 것이다. 그때는 땅파고 강 헤집는 것에 대한 반대입장으로 이 글을 썼었다. 지금은 또다른 경제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 뉴딜을 말하지만 정작 뉴딜이 없다. 잃어버린 10년 시절 일본정부가 그토록 토목에 투자했음에도 정작 경기는 전혀 살아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인가. 수십조의 돈을 들여 강바닥을 파헤쳤건만 과연 국가경제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과연 지금 우리의 현실에 필요한 경제정책은 무엇인가. 어떤 정책이 지금의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필요하다. 교과서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 정상과의 만남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비를 줄이고 더 쥐어짜라 말한다. 빚까지 벌써 한계인데 더 줄이고 아끼라 말한다. 그런 정책들이 통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시계는 과거로 돌아간다. 내가 미친 것일 게다.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