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대통령과 테러리즘, 사유화된 권력과 국민...

까칠부 2015. 12. 12. 07:33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느 기업에서 중요한 인수합병을 결정하려 한다. 그런데 자칫 기업에 크나큰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이다. 주주 여럿이 찾아와 CEO에게 항의한다.


"만일 잘못되면 우리가 가진 주식의 가치도 떨어지고 자칫 배당금마저 손해보는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서 결정하라."


그러면 이들 주주들은 기업에 반대하는 적인 것인가.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DAESH와 같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테러리즘으로부터 이 사회를 지키는 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 아닌 것인가.


국론이라는 말에서 대통령과 우리 사회 다수의 국가에 대한 인식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생각과 주장의 합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이 가지는 이해와 입장과 견해의 합이 아니다. 국가의 생각과 주장이 있고 그를 따르는 국민이 있을 뿐이다. 국민은 주인이 아니다. 단지 대상이고 객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란 무엇인가. 그래서 건국절이지 않은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니까 건국절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언제부터 있었는가. 그러나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가 들어선 것이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정부가 곧 국가다. 그리고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자신, 혹은 자신들이 국가다. 따라서 자신들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애국심의 실체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에 충성한다. 정부를 장악한 권력에 충성한다. 하기는 꽤 고위장성의 부인 되는 이가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취직해서 열심히 일해서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 나라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다. 보편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정의일 것이다.


어째서 특히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저토록 맹목적으로 현정부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그것이 애국이니까. 그것이 정의니까. 다시 주인이 돌아왔다. 나라의 주인이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왕조의 사고방식이다. 권력이 곧 국가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심지어 피를 나눈 자식보다도 더 국가를 위에 두기도 한다.


차라리 너무 솔직할 것이다. 아예 꾸미려고도 하지 않는다. 억지로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다. 당당히 드러낸다.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아주 티끌만한 미혹조차 없다. 너무 정의롭다. 확신하는 저의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그늘이 없는 인간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현실을 부수고야 만다. 공포는 현실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그것을 막을 수단은 어디에 있겠는가. 지지율마저 높고 사람들은 그에 길들어가고 있다.


마음이 급하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느긋하다. 때로 체념하고픈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어디서든 어떻게든 적응하며 사람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불편하고 너무 성가시다. 무엇보다 현실이 될 것이다. 노동자만 더 희생하면 경제는 다시 좋아질 수 있다. 국민이 아니다. 국가를 위한 대상이며 수단이다.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무엇을 위한 정부인가.


하기는 그래서 처음부터 두려웠었다. 조금의 그늘도 보이지 않는 정치인 박근혜의 투명한 해맑음에. 파시즘은 가장 선하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도덕적인 폭력의 형태로 현실로 다가온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양심을 마비시키며 조금씩 중독시켜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공포는 현실이 되고 있다.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정작 열쇠를 쥔 몇몇 특정인들은 그에 전혀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중요하게 싸워야 하는 순간에 다른 싸움에 더 열중이다. 말 만이라도 몇 마디 돕는 정치인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의가 선의이기 위해서는 절박함을 이해해야 한다. 마른 가뭄에 내리는 비가 진짜 단비다.


생각이 많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 아니기를 바란다. 단지 억측이기를 기대한다. 불과 30년. 선배들의 희생이 바보같았다 여기고 마는 이유다. 한국인에게는 너무 이르고 너무 안어울렸다. 시간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