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조준과 하륜, 또다른 지식인의 유형에 대해서

까칠부 2015. 12. 22. 03:30

어쩌면 고려말의 난세를 살아가는 여러 사대부의 유형을 통해 현대사회에서의 지식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한 번 되짚어 보고자 하는 의도인지 모르겠다. 이상이 좌절되자 자포자기하여 오히려 더 빨리 현실에 타협하며 타락해간다. 이상이 좌절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이상을 꿈꾸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지레 현실에 절망하여 혼자서만 오로지 생각만으로 정의를 추구하며 꿈꾼다. 세상을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 가두고 맘껏 희롱하며 조롱하고자 한다. 모두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들이다.


다짐과 각오는 이성계(천호진 분)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준(이명행 분)에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조준 자신이 이성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니 필요하다면 신발 바닥을 핥아서라도 전부가 아닌 일부라도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걸했어야 하는 것이다. 정도전(김명민 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진 사람을 직접 찾아서 몇 번이고 거절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설득해 나가거나, 아니면 하륜(조희봉 분)처럼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는 대신 그 대가로 자신이 바라는 일부를 얻어내는 거래를 시도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어차피 되지 않을 것이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은 - 심지어 해보자고 하는데로 핑계를 대어 거절부터 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조준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허구의 조준이 그렇다는 것이다.


너무 머리가 좋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때로 세상이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간단한 덧셈과 뺄셈에도 어려워하는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의 마음과 닮았을 것이다. 이리 더하고 저리 빼면 답이 나오는 쉬운 문제인데 어째서 저리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얼굴을 찌푸리는가. 그래서 괜히 도와주고 싶고, 참견하고 싶고, 그러다가 가끔은 장난도 치고 싶다. 귀엽다는 것은 때로 자신에게 전혀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마음놓아도 좋은 대상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하륜이 이성계와 정도전의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동분서주하는 이유인 것이다. 조준(최종환 분)을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에 반대해서도 아니겠다. 단지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기억시키겠다는 의도 한 가지였다. 그렇게 책략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인정받겠다는 목적 하나였다. 자신은 이렇게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뛰어나고 위대한 존재다.


역시나 정도전의 역할이나 비중이 처음만 못하다. 갑분(이초희 분)이 사라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갑분의 위치에 분이(신세경 분)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중국을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에는 거지들의 결사인 개방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무협소설에서 개방이 맡는 역할도 분이와 같은 정보다. 어디에나 있는 수많은 거지들을 이용해서 방대하며 치밀한 정보력을 갖추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방지(변요한 분) 역시 여러 상황에서 갑분이 가진 개경 하층민의 정보력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밖에 대부분의 나머지 상황에서 정보를 모으고 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다름아닌 분이대장이 이끄는 개경의 백성들이었다. 정확히 역할이 겹친다. 더구나 배역의 비중에서 갑분은 분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분이가 화면에 더 자주 많이 보일수록 갑분이 나설 자리는 사라진다. 연희(정유미 분)의 존재로 인해 이방지와의 관계 역시 애매해진 것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다. 그럴 것이라면 차라리 분이에게 처음부터 갑분의 역할까지 맡겨서 개경의 거지와 부랑자들까지 통하도록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유력한 정보조직으로 화사단과 비국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정보를 개경의 백성들과 하층민들은 알고 있다. 정보의 정밀함이나 정확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양과 속도에서는 오히려 앞선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 분이가 보이고 있는 능력이라면 그런 단점까지도 충분히 개인의 역량으로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이에게 삼한제일검 이방지라는 넘치도록 훌륭한 무기까지 더해진다. 분이는 정보를 맡아 기득권의 편에 선 화사단과 비국사와 경쟁하며 정도전이 이루려 하는 이상을 돕는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채 그저 얼굴만 비추려 하다 보면 결국 다른 누군가를 훔치고 빼앗고 가리며 드라마에 혼란만 주고 말 뿐이다. 당장 정도전부터 분이와 이방원(유아인 분)을 위해 상당부분 역할과 분량을 양보하며 애매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아주 오랜만에 책략이 아닌 조준을 설득하는 역할로써 비로소 자신의 비중을 되찾았다. 물론 결국 조준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은 이성계의 진심이었다.


토지개혁을 위한 그동안의 조준의 연구와 준비를 '자료'라는 형태로 유형화하여 쟁탈의 대상으로 삼는다. 마치 무협소설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기보를 쫓는 것처럼 조준의 연구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세력들이 서로 경쟁하며 싸움을 벌인다.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고자 하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입장에서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자료인 것이다.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땅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권문세족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부정하는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해악인 것이다. 비밀조직 '무명'은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누구의 지시로 사람까지 해쳐가며 조준의 연구를 가져가려는 것이었을까. 무협의 정석대로라면 지금까지 출연한 인물 가운데 전혀 뜻밖의 반전을 감추고 있을 인물이 한 사람 있다.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얼굴을 감춘 채 가족마저 속이며 태연히 연기하고 있다. 기대가 커지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온 비밀조직의 행보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고려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다. 고려왕조와 왕실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정 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둠속이라서 빛이 바랬다. 더구나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까지 거의 어두운 색이었다. 조금 더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폭력은 불길한 것이지만 액션은 즐거운 것이다. 보다 화려하게 보다 거창하게 꾸며서 보여 줄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이방지가 어째서 삼한제일검인지, 그리고 그동안 무휼(윤균상 분)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싸움을 통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굳이 이름없는 조역들과의 싸움을 길게 끌 필요 없이 한 순간에 짧게 끝내고 이방지의 무력만을 보여준 채 바로 길선미(박혁권 분)와의 대결로 넘어간다. 삼한제일검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수십명의 병사도 한 번에 베어넘길 수 있다. 이방지의 투덜거림 그대로다. 최소한 삼한제일검이라면 자신과 칼을 들고 마주선 모두가 두려워하고 긴장해야 할 이름인 것이다. 때로 너무 상세해도 의미가 반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방원과 하륜이 만난다. 지금껏 한 번도 하륜은 정도전을 이겨보지 못했다. 그 정도전을 죽인다, 그 정도전의 계획을 좌절시킨다. 정도전의 출신을 더럽히고, 그 가족마저 노비로 만든다. 1차 왕자의 난을 계획하고 직접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까지 맡았던 이가 바로 하륜이다. 화사단에 사로잡힌 이방원이 끌려간 곳에 바로 하륜이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 모습을 분이가 또 본다. 하지만 의미가 있을까? 이방지도 길선미와 다시 만난다. 인연은 운명이다. 만남은 앞으로 만들고 겪게 될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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